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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다시 보자]고구려사 쟁점들…(4)신묘년조

입력 | 2004-04-26 18:06:00

고구려 광개토왕의 영토확장 경위,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5세기 동아시아 국제판도 등을 담은 광개토왕비. 장수왕이 세운 이래 1590년간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서 있는 이 비석은 2003년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고구려 유적 복원사업에 따라 방탄유리벽으로 싸이게 됐다. 유리벽이 생기기 이전에 촬영된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광개토왕비는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왕(391∼412)의 훈적(勳積)을 기리고 왕릉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그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 9월 29일에 세운 석비(石碑)다. 높이 6.39m, 무게 37t에 이르는 이 거대한 비석은 현재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 있다. 이 비석의 사면에 모두 1775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중 150여자는 현재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다.

광개토왕 비문은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부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왕계(王系), 그리고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2부에는 광개토왕이 수행한 정복활동의 내용과 그 성과를 연대별로 서술해놓았다. 3부에는 왕릉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수묘제(守墓制)를 개혁했다는 내용과, 수묘인의 출신지 등을 밝혀 놓았다.

광개토왕비가 유명해지게 된 것은 일본이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비문을 조작했다는 비문변조설이 확산되면서부터. 건립 이래 1590년간이나 그 자리에 서 있는 이 비석의 조작설이 나오게 된 것은, 이 비석이 재발견되는 과정에서 석연찮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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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문 조작설 제기 되면서 해석 논쟁 치열

광개토왕비 묘비에 새겨진 신묘년조 기록의 일부.-동아일보 자료사진

발해 멸망 후 한국사의 무대가 한반도로 국한됨에 따라 광개토왕비는 우리 민족의 기억 속에서 한동안 사라졌다. 광개토왕비가 우리 문헌에 다시 등장한 것은 조선조에 이르러서였다. 이때는 금나라 황제의 업적을 적어놓은 비로 알고 있었다. 이 비가 고구려 광개토왕비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청나라가 건국 후 지안을 포함한 백두산 지역 일대를 황족(皇族)이 발생한 신성지역이라 하여 봉금(封禁)함에 따라 비석 주변 일대는 모두 황무지로 변했다. 19세기 말 봉금이 해제되고 지역개발이 시작되면서 광개토왕비의 존재가 다시 알려지게 됐다. 중국학자들은 금석학적으로만 관심을 가졌으므로 본격 연구는 일본 참모본부 소속의 관변학자들에 의해 진행됐다. 만주 정세 파악을 위해 파견된 스파이 사코 가게야키(酒勾景信)가 1883년 비의 탁본을 일본으로 가져간 뒤 약 5년간 참모본부에서 비밀리에 연구했던 것. 일본에서는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합리화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광개토왕비 신묘년조(辛卯年條)에서 찾았다고 흥분했다.

이로부터 이른바 신묘년조의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이 구절을 둘러싼 해석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지만 내용상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조공을 바쳐왔는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이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관변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이다.

둘째, 위 기사에서 辛卯年來와 渡海破를 끊어 읽고, 이 사이에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됐다고 보는 설이다. 한말의 유학자 위당 정인보는 이런 시각 아래 바다를 건너 백제와 그 다음에 등장하는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은 주체가 왜가 아닌 고구려라고 보았다.

셋째, 신묘년(391년)조는 그 다음에 등장하는 영락6년(396년)조의 기록, 즉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58성 700촌을 함락시킨 백제 정벌을 합리화하기 위해 왜를 등장시켰다는 설이다.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백제침공을 위한 명분용으로 고구려가 과장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1974년 일본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에 의해 제기됐다.

● 왜(倭), 당시 국제관계의 주요변수

그런데 1970년대 재일교포학자 이진희씨가 광개토왕비에 석회를 발라 비문을 조작했다는 설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이는 식민사관의 청산과 민족사학의 계승발전이라는 점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한국 사학계의 주목을 끌었고, 나아가 일반인들에게까지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중국학자 왕젠췬(王健群)이 비에 석회를 바른 것은 탁본의 편리를 위해서였을 뿐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비문변조설은 많이 퇴조했다. 중국의 개방 이후 비(碑)를 직접 볼 수 있게 됐고, 석회가 발라지기 전에 떠낸 원석탁본(原石拓本)도 발견됐다. 하지만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아 비문변조설과 그 부정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광개토왕 당시 왜가 한반도에서 벌어진 국제관계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고 있었다는 점과, 그때 왜의 활동은 항상 백제와의 관련 아래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쪽에서는 왜의 실체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경향이 있고, 일본 쪽에서는 이를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광개토왕 비문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4세기 말∼5세기 초 한반도 남부지역의 국제관계는 백제-가야-왜가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었고, 고구려-신라가 이에 대한 상대세력으로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여기에서 양측의 주축이 된 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였다.

김현숙 경북대 영남문화연구권 책임연구원

▼고구려는 독자적 ‘大王國土’▼

중국 지린성 지안시의 태왕릉 주변에서 지난해 발견된 청동방울의 그래픽. 표면에 ‘신묘년 호태왕 무조령 구십육(辛卯年 好太王 巫造鈴 九十六)’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로 인해 태왕릉이 광개토왕의 묘로 고구려가 신묘년에 왜를 격파한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청동방울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나왔다.

○광개토왕비의 천하관

광개토왕비가 갖는 역사자료로서의 중요성은 고대 한일 관계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광개토왕비는 4, 5세기 고구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발전 수준, 당시 고구려인의 정신세계를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타임캡슐이다.

이 중에서도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고구려사 귀속 문제와 관련해 특히 주목되는 것이 고구려왕의 천하관(天下觀)이다. 비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 보면 고구려왕이 중국과 다른 독자적 천하관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왕의 천하 속에는 먼저 대왕국토(大王國土)에 살고 있는 고구려민이 있고 그 외곽에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고 충성을 다해야 하는 속민(屬民)인 동부여와 백제 신라 숙신이 있었다.

이들 외에 비문에 등장하는 왜(倭)와 거란의 일파인 패려(稗麗)는 타파, 또는 공파의 대상이었을 뿐 자국의 천하 안에 넣을 존재가 아니었다. 당시 고구려와 가장 빈번하게 전쟁을 벌였던 후연(後燕)에 대한 내용은 비문에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중국은 당시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관심 밖에 있는, 즉 별개의 천하에 속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4, 5세기 고구려왕의 천하관을 보면 당시 고구려가 자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하는 중국측 주장이 억지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