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가 하루 한두 편밖에 운항하지 않고 목포항으로도 목선이 오가던 20여년 전. 농사라고는 조와 유채뿐이어서 쌀 과일 등도 모두 목선으로 조달했던 그 시절. 풍랑으로 뱃길 끊기면 몇 날이고 짐칸에서 썩다시피 한 사과마저도 섬에서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라고 섬사람들은 말한다. 끈기가 없어 펄펄 날리던 묵은 정부미 쌀밥은 벌써 옛이야기고 뭍에 나가려면 큰마음 먹어야 했던 생활의 옹색함도 사라진 지 오래니까. 국제자유도시로 지정된 후에는 영어를 섬 공용어로 쓰자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니 그 변화야말로 상전벽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봄의 섬 풍경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연녹색 살짝 감도는 노란 꽃봉오리의 유채꽃 무리가 구멍 숭숭 난 제주 돌로 담장 둘린 너른 밭을 그득히 메운 풍경이나 해넘이의 저녁노을이 푸르디푸른 제주도 하늘과 바다를 붉디붉게 물들이는 것이나 아니면 한밤중 어선들이 고촉광의 집어등을 밝혀 수평선에 어화(漁火)를 피워내는 풍경이 그러하다.
그중에서도 꽃으로 뒤덮여 온통 노랗게 채색된 유채밭은 지금도 섬 전역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제주도의 상징적인 풍경이다. 유채꽃 큰잔치(17, 18일)가 열렸던 지지난 주말. 이미 꽃이 진 곳도 보였지만 그래도 곳곳의 유채밭은 여전히 샛노란 꽃으로 뒤덮여 대지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남제주군 표선면 정석항공관 근방 들판의 도로는 시속 60km로 10분 이상을 달릴 정도의 긴 구간에 걸쳐 양편이 온통 노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유채꽃밭을 보면서 깨닫는다. 이 봄 섬의 빛깔은 노란색임을. 유채꽃밭의 도발적인 노란 빛을, 수천평 너른 땅에서 햇빛 아래 일시에 노출시키는 그 화려한 빛의 향연을 뭍에서는 즐길 곳이 별로 없다. 어쩌다 관광용으로 조성한 곳도 보이지만 그 풍경과 감흥은 제주 것과 사뭇 다르다. 유채의 노란 꽃 풍경은 하늘 넓은 제주 섬에서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그리고 검은 화산돌 담장 뒤로 보아야 제격이다.
제주는 빛깔 있는 섬이다. 그 빛깔은 다섯이다. 절물자연휴양림의 거대한 삼나무 숲을 보자.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한 숲은 어찌나 푸르고 숲 그늘은 또 어찌나 짙은지 그 안에서 옷을 벗어 쥐어짜면 초록 물이 뚝뚝 떨어질 듯하다. 파란 바다는 또 어떤가. 눈을 일부러 감기 전에는 절대로 시야에서 떠나지 않는 바다만의 세상, 제주의 현란하리만큼 다양한 파란 물 빛깔은 상상을 초월한다. 글 쓰는 게 직업인 기자지만 그 물빛 앞에서는 표현의 한계를 절감한다.
해질 녘 바다와 하늘을 보자.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낙조는 뭍에서도 볼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해넘이 후 서편 하늘의 하얀 구름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코발트빛 하늘과 보색의 대비를 이루는 저녁노을은 어찌할 것인가.
밤이 되어도 제주 섬의 색깔은 죽지 않는다. 그때 오히려 살아나는 빛깔은 그 어느 것보다도 찬란하고 화려하다. 밤바다에 피어나는 어화다. 불 밝혀 고기잡이 하는 어선 집어등의 하얀 불빛이 반짝이는 밤바다는 섬이 아니면 도저히 볼 수 없는 귀한 볼거리다.
그리고 갈치의 형광 빛깔 비늘과 홍삼의 주황빛깔 연체, 줄돔의 화려한 흑백 스트라이프, 제주 감귤의 노란빛, 차밭의 초록빛, 그리고 뭉게구름의 하얀빛…. 섬에서는 먹는 것에서도 빛깔 타령을 늘어놓을 만하다.
이처럼 자연의 빛깔을 그대로 간직한 청정 섬 제주. 그런 까닭에서일까. 예서 찍은 사진은 좀 다르다. 순수한 공기 덕분에 빛깔마저 그대로 투명하게 사진에 나온다. 그러니 앞으로 제주도에서는 그 빛깔까지도 눈여겨 보자. 자연의 자연스러움이 그 빛깔에서 오니까. 오염된 자연이 제 빛깔을 낼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글·사진=조성하기자 summer@donga.com
▼환상의 제주도 5색투어▼
‘빛깔 있는 섬’ 제주도의 다섯 빛깔을 찾아 떠나는 투어. 과연 어디로 가면 좋을지 알아본다.
○ 색깔 있는 여행지
▽노란색=유채 꽃밭에서 찾자. 비자림(북제주군 구좌읍) 주변에 가면 섬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너른 벌판에 유채 꽃밭이 널려 있다. 넓은 밭 주위는 검은 돌로 쌓은 돌담이 둘러쳐져 있는데 유채꽃은 이 돌담과 어울려야 제격이다.
정석비행장과 항공관(남제주군 표선면) 부근에는 유채꽃으로 장식된 도로도 있다.
▽빨간색=저녁 노을이 으뜸으로 용두암과 탑동(제주시)의 해넘이 풍경이 좋다. 탑동 방파제는 용두암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낙조의 촬영 포인트다. 방파제 앞 라마다플라자호텔(삼도2동)의 객실 혹은 로비의 발코니도 좋다.
▽하얀색=5월 초 피기 시작하는 제주 감귤의 흰 꽃, 밤이면 섬 주변의 바다에서 피어나는 어화(漁火)가 제격. 어화란 밤바다에 나가 집어등을 이용해 고기를 잡는 배의 불빛이 수평선 위에 점점으로 나타난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 남원의 큰엉(절벽해안) 산책로는 어화 감상 포인트.
▽파란색=에메랄드빛 바다는 애월항과 한담동, 곽지(이상 북제주군 애월읍), 협재, 동편에는 함덕(조천읍) 김녕(구좌읍)에서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 볼 수 있다.
▽초록색=절물자연휴양림(제주시 봉개동)과 휴양림 주변 1112번 도로의 숲 구간(11번 국도 삼거리∼소인국미니월드)이다. 장대처럼 쭉쭉 뻗은 삼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룬 삼림지대로 숲 안은 숲 그늘로 인해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다.
야트막한 구릉에 조성된 대규모 차밭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설록차 뮤지엄 '오설록'. 오른쪽은 최근 문을 연 제주도 중문의 자연주의 타운하우스형 펜션 '재즈마을'.
초록 섬 제주의 특징적인 풍경을 하나 더 들자면 태평양그룹의 차 홍보관 ‘오설록’(남제주군 안덕면)과 주변의 녹차밭(서광다원)을 들 수 있다. 야트막한 구릉의 16만평 대지를 뒤덮은 차나무의 푸른 잎은 차맛만큼이나 싱그럽다. 오설록은 여행길에 휴식하며 차분히 산책하기에 좋은 곳. 전망대에 오르면 한라산과 다원의 초록빛 차밭을 두루 감상할 수 있고 주변에는 산책로도 있다. 뮤지엄 1층에는 우리 차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관도 있다. 휴게실에서 파는 연녹색의 녹차 소프트아이스크림은 별미다.
○ 여행정보
△라마다프라자호텔=제주공항에서 2.6km(www.ramadajeju.co.kr, 064-729-8100).
△오설록 뮤지엄=오전 10시∼오후 5시 개관, 무료(www.sulloc.co.kr, 064-794-5312).
△절물자연휴양림=휴양림 숙소 ‘숲 속의 집’ 예약은 관리사무소에서 전화(064-721-4075)로만 받는다. 5월 사용분은 4월, 6월 사용분은 5월 등 한 달 앞서 받는다. 예약은 선착순이며 접수는 매달 1일 오전 8시부터. 산림청 홈페이지(www.foa.go.kr) 참조.
○ 여행정보지 무료 구독
제주에 있는 제주도 전문 여행사 ㈜대장정투어(www.djj.co.kr)가 무료 배포하는 ‘월간 제주지도정보’는 섬의 독특한 문화와 여행에 필요한 정보(음식 관광지 펜션 체험)를 관광지도 및 할인쿠폰까지 곁들여 제공하는 포켓판 크기의 16쪽짜리 잡지(올 컬러)다. 매달 우송해주는 이 잡지는 잘 모아 두면 여행계획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구독(무료)신청은 홈페이지를 통해 접수. 1577-4241, 064-711-8288
○ 숲 속의 자연주의 펜션 ‘재즈 마을’
남제주군 중문의 한적한 삼나무 숲 속에 있는 ‘재즈마을’은 잔디정원을 갖춘 목조주택 4채(객실 총25개)가 한 울타리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자연주의 개념의 타운하우스형 펜션 마을. 각채의 주인이 함께 살며 이룬 재즈마을은 건물마다 ‘노래하는 산호’ ‘시네마 천국’ ‘푸른 지붕’ ‘더 왈츠’ 등 각기 다른 이름과 휴식 개념(문학도서 영화 미술 음악)을 갖고 있다. 객실은 복층형으로 1층은 주방 및 거실, 2층은 침실. 매일 저녁 정원에서는 바비큐 파티가 펼쳐진다. 아침마다 오븐에서 직접 빵을 구워 먹을 수 있는 빵굼터와 산책의 동반자가 되어줄 개도 준비중이다.
객실은 23평형 복층(4∼6인), 15평 원룸(4인), 30평 투룸(6∼8인)이 있다. 복층은 15만원, 원룸은 10만원(비수기). 재즈마을(www.jazzvillage.co.kr , 064-738-9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