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은 90년대 중반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 심사를 맡은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최종후보 2편 중 수작(秀作)이긴 하지만 이야기의 공간이 협소한 작품을 뽑았다. 심사경위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낙선작도 뛰어나다. 하지만 투고자가 나와 같이 일했던 영화계 후배여서 뽑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문화관광부가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主賓國)’ 행사의 하나로 지원하고 있는 ‘한국의 책 100’과 관련해 선정 리스트가 발표된 지 한 달이 지난 현재까지도 비판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선정위원단은 ‘선정위원이 저자인 책은 뽑지 않는다’는 것을 중요 원칙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소장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작가 이창동’과 같은 엄정한 태도가 아쉬워지는 이유다.
우선 선정위원인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는 자신이 공동저자인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을 뽑았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책을 기획한 김상환 교수가 대표 필자였으며 나는 부분 필자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저자 9명을 소개한 책 어느 곳에도 이 같은 구분은 없다. 더구나 김 교수는 “(같은 철학분야 선정위원인) 한형조 정신문화연구원 교수에게 내가 같이 썼다는 걸 직접 알리지는 않았으며 제동을 받지 않아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철학 분야 선정위원인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의 제자들이 쓴 ‘동아시아 여성의 기원’도 뽑혔다. 이 책은 정 교수의 저작이 아니니 원칙을 어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정성’이라는 ‘선정 취지’에서 벗어났다는 비판은 면키 어렵다.
두 권의 책이 ‘우리 학계의 수준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좋은 저술’임은 분명하다. 이 책들을 선정해서 두 선정위원이 얻을 수 있는 이익 역시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그러나 선정위원이 된 것은 “내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공정성을 확보하겠다”는 선정자의 역할에 동의한 것이다. 애초 ‘한국의 책 100’ 선정은 누구에게도 ‘어렵고 곤혹스러운 짐’이었다. “내 책은 뽑지 않는다”는 원칙은 탈락자들의 흔쾌한 동의를 얻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했다. 더구나 ‘주빈국’ 행사가 문화계 여러 분야의 자발적 협력을 얻어야 가능함을 고려한다면 선정의 엄정성은 절실한 것이었다.
내년 10월 ‘주빈국’ 행사를 제대로 치러내기 위해 할 일이 많다.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는 오해와 비판의 여지를 최대한 줄여 참여자들의 활력을 북돋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