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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인]와인 진수 가려볼까/전통의 보르도 vs 뜨는 캘리포니아

입력 | 2004-04-29 16:01:00


《전통과 합리. 두 단어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전통을 내세우면 연륜은 깊으나 어딘가 구태의연해 보이고 합리를 강조하면 과학적이지만 왠지 정이 없어 보인다. 국내 와인 소믈리에 1호로 꼽히는 서한정씨는 자신의 책에서 구세계와 신세계의 와인을 비교하면서 이 두 단어를 사용했다. 구세계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같은 유럽 국가를, 신세계는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미국 호주 칠레 같은 나라를 의미한다. 과연 전통과 합리라는 척도로 두 지역의 와인을 구분할 수 있을까. 소비자는 어떤 와인을 선택해야 하는가. 마침 한국을 찾은 프랑스와 미국의 와인 전문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두 사람은 두 나라의 와인 중심지인 보르도와 캘리포니아에서 왔다. 》

○ 레드와인의 대명사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 지역은 레드 와인의 대명사 같은 곳. 이곳 출신의 파트리크 레옹(61)은 64년 보르도 양조학교를 졸업한 후 40년간 와인을 만들어 왔다. 프랑스 무통 로칠드의 양조 책임자로 있다가 몇 달 전 은퇴하고 보르도 프롱삭에서 샤토 르 투아 쿠아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보르도 와인의 강점은 무얼까. 레옹씨는 “몇 세기에 걸쳐 내려온 ‘블렌딩’ 기술이야말로 보르도 와인의 우아함과 세련미를 만들어내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같은 포도 품종의 원액이 담긴 오크 통이 악기라면 블렌딩은 이들을 적절히 조합해 교향곡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단순 총합이 아니라 없던 향과 맛이 새로 나타난다.

보르도 와인 메이커의 고집은 ‘테루아’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테루아는 토양 기후 일조량 지질 지형 등 포도밭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연 요소 전체를 뜻한다. 테루아를 그대로 표현해 내는 와인이 좋은 와인이다. 기후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그 해 하늘의 뜻을 그대로 와인으로 옮긴다. 이 때문에 보르도 와인은 빈티지(포도 수확연도)에 따라 품질이 들쭉날쭉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하지만 솔직하다.

레옹씨는 “포도나무는 옮겨다 심을 수 있지만 보르도의 테루아는 가져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이 캘리포니아로, 말벡이 아르헨티나로, 카르메네르와 메를로가 칠레로 옮겨가 새로운 와인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 신대륙 와인의 기수

켄달 잭슨 아시아 총괄 담당 사장 스티브 메싱어.

캘리포니아 와인의 역사는 200년이 채 안 된다. 보르도 지방의 와인이 8세기 무렵 영국에 수출까지 했던 것과 비교하면 일천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한국의 와인 시장에선 미국은 프랑스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4위인 것을 생각하면 유독 한국 시장에서 강세다.

미국을 대표하는 와인 업체인 켄달 잭슨의 아시아 총괄 담당 사장인 스티브 메싱어(56)는 “산학 협동의 체계적인 연구와 도전정신이 캘리포니아 와인의 품질을 빠른 속도로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와인 연구로 유명한 UC데이비스에서 양조학을 전공했고 몇몇 와인 업체를 거쳐 94년부터 켄달 잭슨에 근무했다.

메싱어씨는 “보르도 와인은 숙성을 중시해 오래 기다려야 하는 데 비해 캘리포니아 와인은 상대적으로 과일 자체의 맛이 드러난다”며 “캘리포니아 와인은 빈티지와 무관하게 매년 늘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캘리포니아 것은 또 블렌딩보다는 품종을 중시한다.

나파밸리 등 캘리포니아의 와인메이커들은 2월부터 10월까지 비가 오지 않는 기상 조건을 관개 시설로 극복했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 오크 통에서 숙성시키는 대신 스테인리스 통에 오크 조각을 넣어 향을 내기도 했다. 이 모두 테루아를 중시하는 프랑스에선 불법이지만 이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싸고 좋은 와인을 공급한다.

일반적으로 캘리포니아 와인의 이름에 포도의 품종을 명시하는 것도 사람들이 어떤 와인을 마시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게 하자는 배려에서다.

○ 화해

샤토 르 투아 쿠아를 운영하는 파트리크 레옹.

두 전문가는 상대방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극도로 자제했다.

“더 우수한 와인이라는 것은 없다. 종류가 다른 즐거움을 줄 뿐이다. 캘리포니아의 카베르네 소비뇽을 열등하다고 할 수는 없다.”(레옹씨)

“자신이 마시고 싶은 것을 마셔라. 그러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메싱어씨)

결국 개인의 좋고 싫음은 있어도 와인의 좋고 나쁨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여행을 하는 것처럼 세계 곳곳의 와인을 마시며 그 지역을 떠올리고 즐거움을 얻으면 된다는 의미다.

두 전문가는 우열을 가려달라는 기자의 질문을 집요하게 피해갔지만 “한국 와인 애호가들에게 어떤 와인을 추천하고 싶으냐”고 묻자 속내를 조금 드러냈다.

레옹씨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역시 보르도 레드다. 가장 균형 잡히고 우아하며 섬세한 와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고 메싱어씨는 “캘리포니아 고유 품종인 진판델로 만든 담백한 와인이 한국 음식, 특히 불고기에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글=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사진=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