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 대원씨엔에시홀딩스
2002년 베를린영화제 시상식. 최고 영예인 황금곰상을 호명할 차례가 되자 장내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상작은 일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근엄한’ 베를린영화제의 최고상을 애니메이션이 차지한 것은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 미야자키 감독은 그동안 아시아권과 서구의 일부 마니아에게 ‘애니메이션의 신’으로 추앙받긴 했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비로소 국제적 거장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 수입 제한조치 탓에 극장에서 볼 수 없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붉은 돼지’ 등은 애니메이션 팬이라면 반드시 구해 봐야 하는 고전으로 불렸다.
이번에 국내 개봉되는 ‘천공의 성 라퓨타’만 해도 1986년 작품으로 이미 수만명이 이 작품을 ‘관람’(?)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대형 스크린으로 만났을 때 여전히 새롭다는 느낌을 준다.
미야자키 감독은 1941년 도쿄에서 출생했다. 비행기회사를 경영하는 큰아버지, 공장장인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비교적 부유하게 자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큰아버지가 비행기회사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의 주요 테마인 비행(飛行)과 푸른 창공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고등학생 시절 이미 애니메이션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그가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는 점은 훗날 그의 작품세계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대학시절 그는 공산당 기관지인 ‘아카하타’의 청소년판인 ‘소년소녀신문’에 ‘사막의 백성’이란 만화를 기고했는데 공상과학과 마르크시즘을 결합한 내용이었다.
이런 이념적, 정치적 성향은 작품 속에 간접적으로 투영돼 있다. 예컨대 돼지얼굴의 비행정 조종사 포르코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빨간 돼지’는 파시즘에 복종하느니 차라리 돼지로 변해버린 한 인간을 통해 독재 권력, 전체주의 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아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현대기계문명에 대한 저항의식, 그리고 ‘천공의 성…’은 무정부주의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완성된 지 무려 18년 만에 국내에 ‘늦깎이’ 개봉되는 ‘천공의 성…’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떠도는 섬 라퓨타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이야기는 광산촌에서 기계 견습공으로 살고 있는 밝은 성격의 고아 소년 파즈가 빛나는 목걸이를 한 채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 시타를 구해주는 데서 시작된다. 시타는 신비한 힘을 지닌 목걸이로 인해 군대와 해적에게 쫓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추적을 피해 하늘을 떠돌고 있다는 전설의 섬 라퓨타에 도착한다.
그러나 라퓨타의 힘을 부활시켜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음모를 발견하면서 시타와 파즈는 엄청난 결정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영화의 백미는 시타가 음모를 막기 위해 할머니로부터 배운 파멸의 주문을 외우자 라퓨타가 산산이 부서져 공중분해 되는 마지막 장면이다.
미야자키 감독은 어린이용으로만 인식돼온 애니메이션에 인간의 탐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식과 함께 환경보호주의, 무정부주의적 이념을 가미시킴으로써 이른바 ‘철학적 애니메이션’의 길을 열었다.
‘천공의 성…’이 80년대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주제의식이 새롭고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30일 개봉. 전체 관람 가.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