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학의 모험1/김교빈 이정우 이현구 김시천 지음/284쪽 1만원 들녘
서양 근대학문의 분석틀에 맞춰 이른바 분과학문으로서의 ‘동양철학’을 구성해 내는 단계를 벗어나 본래 동양적 사유의 체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된 것은 이미 20년이 넘었다.
아직도 이 문제의식을 구체화한 눈에 띄는 성과는 보이지 않지만 ‘기(氣)’는 그래도 희망의 근거가 된다. 서양철학의 기준으로 발생론, 존재론, 형이상학뿐 아니라 윤리학과 심리철학까지 이른바 근대 학문으로서 철학의 거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내용이 동아시아의 전통에서는 ‘기’라는 개념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기’만 제대로 알면 동양철학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는 수천년 세월 속에서 너무도 많은 내용을 담아 왔기 때문에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은 ‘기’에 관심을 가져 온 철학 연구자들이 기의 역사와 그 의미를 밝히기 위해 진행해 온 공동연구의 성과다. 이들은 각자 다른 세부전공을 가지고 있으면서 모두 ‘기’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해 왔고, 2003년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공동으로 강의를 하면서 생각을 다듬었다. 이 책은 이 강의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그 난해한 주제를 다소 쉽게 서술할 수 있었다.
김교빈 교수(호서대·한국철학)는 ‘기’라는 개념의 생성부터 변화의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한의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에서도 ‘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돼 온 용례를 정리했다.
나아가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사례를 통해 조선에서 ‘기’ 중심의 철학적 사유가 전개된 내용을 검토했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서양철학)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비교하며 “초월적 사유에서 내재적 사유로, 영원의 사유에서 생성의 사유로의 사유방식의 변화가 동서양에서 모두 보편적이었다”고 주장하며 이런 변화가 ‘기’ 개념의 전개에서도 드러남을 밝혔다.
도가철학 전공자인 김시천 철학아카데미 강사는 “조선 성리학에서 홍대용과 최한기로의 전환을 도덕 형이상학에서 과학으로의 담론의 전환”이라고 규정했고, 이현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전임연구원(한국철학)은 19세기에 서양과학을 수용하면서 ‘기학’의 체계를 세운 혜강 최한기(惠崗 崔漢綺)의 철학을 집중 조명했다.
‘기’의 전모를 드러낼 만한 방법론을 찾아가는 길은 아직도 지난한 과정이겠지만 독자들은 현재까지 ‘기’에 관한 연구 성과들을 이 책을 통해 일괄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전 3권으로 계획된 ‘기학의 모험’은 2권에서 음악, 회화, 문학, 음식 등 동아시아의 전통 문화에서 ‘기’의 역할에 주목하고, 3권에서는 한의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과 과학철학의 입장에서 ‘기’에 접근할 계획을 잡고 있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