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로 그린 그 진한 사랑/윤구병 등 지음/229쪽 9800원 옹기장이
이름난 시인과 철학자, 만화가 등 명사 12명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담은 글 모음이다. 단순히 효(孝)의 덕목을 강조하는 교훈적인 글이지만은 않다. 아버지 어머니와 살던 시절 겪었던 갖가지 일화들을 솔직하게 담아놓았다. 다들 원숙한 필자들이어서 가슴에 맺힌 이야기들도 담담하게 풀어놓고 있다. 그게 오히려 감동을 준다. 세밀화가 이태수씨가 공력을 다한 꽃 그림, 나비 그림이 들어 있어 글의 향기와 잘 어울린다.
윤구병씨는 충북대 철학교수로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95년부터 충북 변산에서 공동체 학교를 꾸려오고 있다. 그는 어머니가 색주가의 작부 노릇을 하다가 아버지의 둘째부인으로 시집왔다고 털어놓고 있다. 허랑방탕한 친정아버지의 무책임함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삶을 살았던 어머니는 이른바 ‘과거’ 때문에 동네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아무하고나 술자리를 함께하는 어머니의 버릇이 고쳐지지 않자 내칠 생각도 했지만, 아이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자 이 마음을 거둔다. 손아랫사람들이 어머니를 하대하지 못하게 했고, ‘언문’을 가르쳤다. 그 어머니는 전란이 일어나자 식구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전투기의 기총소사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폐허 속을 돌아다니며 땔감을 모은다.
시인 신경림씨의 아버지는 옛날 우리 시골 마을에 한둘쯤 있던 ‘좋은 어른’ 같다. 술, 노름을 좋아했지만 가장 좋아한 건 ‘사람’이었다. 아무도 상종해 주지 않는 동네 망나니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만은 “착한 아이”라며 감쌌다. 그 망나니는 전쟁이 끝난 후 국경경비대원으로 ‘금의환향’했는데, 옛날 괄시받은 일에 대해 총을 쏘며 보복하려 들었다. 그때 시인의 아버지가 나서서 ‘귀싸대기’를 올려붙이면서 “몹쓸 놈”이라고 호령하는 대목을 읽으며 지금도 이런 어른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돌아가신 부모에게 잘해드리지 못한 한은 누구에게나 남는 것인가. 만화가 박재동씨는 초등학교 교사였다가 만화가게 주인으로 일하며 아이들을 키워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무렵 신문사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그림을 완성해내야 했고, 오죽했으면…상복을 입고도 그려야 했지 않습니까? 아, 단 며칠이라도, 아니 한 시간, 그때 병원에 아버질 두고 서울로 떠나는 제가 몇 마디라도 다정하게 인사를 했더라면…뭔가 심상찮음을 느끼면서도 ‘그럼, 저 갑니다’ 하고 그냥 올라오다니….”
권기태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