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국민의 40% 정도가 빈곤층이지만 도심 곳곳에 최고급 쇼핑센터가 즐비한 나라. 1960년대까지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살았지만 지금은 재정수입의 3분의 1을 외채 이자로 지출하면서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나라. 6·25전쟁 때는 군대를 파병해 한국을 도왔지만 지금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산업연수생들을 보내는 나라. 바로 필리핀이다.
필리핀의 경제난은 심각하다. 요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 하나는 국민의 낮은 저축 의식이다. 필리핀 거리에선 한국에서와는 달리 은행을 보기 힘들다. 은행에 들어가 봐도 매우 한산한 편이다. 2년 전 처음 필리핀에 왔을 때는 필리핀 사람들이 저축을 잘 하지 않는 것이 그저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우리 집 가정부의 예금계좌를 개설해 주면서 필리핀의 은행 문턱이 너무 높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는 물론 필리핀 부유층이 아니라 직업이 변변치 않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필리핀 은행에서는 대출이 아니라 저축을 하기가 매우 힘들다. 주민등록증 제도가 없는 이곳에서 은행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재직증명서, 운전면허증 등 두 종류의 신분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처럼 신분증을 2개 이상 갖고 있는 필리핀 서민은 많지 않다.
계좌 개설 최저액은 한국 돈으로 2만원이 넘는다. 그러면 계좌는 개설해 주되 통장은 없이 현금인출 카드만 만들어 준다. 통장을 만들고 싶으면 12만∼25만원을 입금해야 한다. 한달 월급이 10만원 수준인 일반 서민들로서는 엄두를 내기 힘든 조건이다.
고용을 창출할 산업기반이 부족한 필리핀의 실업률은 11%에 달한다. 그러다보니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해외에 나간 가족들이 보내오는 돈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해외에 나가 있는 필리핀 근로자는 800만명에 육박하며 이들이 매년 고국에 보내오는 돈은 100억달러가 넘는다. 자신이 힘들게 번 돈도 아닌 데다 은행 문턱도 높으니 서민은 저축보다 소비에 관심을 쏟게 된다.
얼마 전 국제통화기금(IMF)은 “필리핀 해외송금자의 국내 가족과 정부의 ‘도덕적 해이’가 위험한 수준에 달했다”고 경고했다. 달러 송금 수입이 있으니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정부 또한 외화송금이 국민을 보호해 주리라 기대하면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국내경제 불균형에 대한 개선조치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낮은 이자율 때문에 저축률이 하락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저축이 산업투자로 이어지면서 경제가 성장하는 선순환 구조는 아직 한국사회에 굳건하게 뿌리박고 있지 않은가. 한국 TV에서 봤던 은행 공익광고가 생각난다. 한 꼬마가 돼지저금통을 은행에 가져가서 저축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국민에게 저축을 권장하는 내용이었다.
가난한 시골 부모에게 컬러 TV를 장만해 드리고 어린 동생의 학비를 대는 우리 집 가정부. 처음으로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을 갖게 된 그녀를 보며, 열심히 일하고 돈이 생기면 곧바로 은행으로 달려갔던 한국 경제개발 세대의 노고를 떠올린다.
정은주 KOTRA 마닐라무역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