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던 1789년 파리에서는 처음으로 평민대표와 귀족들이 모두 참여하는 삼부회가 열렸다. 왕정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혁명을 주도하는 대표들이 의회에서 처음 만나던 날, 이들은 서로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마저 함께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정에 우호적인 왕당파는 의장의 ‘오른쪽’에 앉았고, ‘왼쪽’에는 혁명당원 출신들이 좌정했다. 그들이 앉은 자리 때문에 역사상 최초로 ‘우파’와 ‘좌파’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게 됐다.
▼중도진보-개혁보수…애매한 修辭▼
그 후 200년 이상이 지났지만 오늘날까지도 우파는 보수의 상징으로, 좌파는 개혁의 대변자로 분류되고 있다. 우파는 대체로 개혁과 혼란보다는 전통적인 가치와 제도를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좌파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기존 질서에 맞서 투쟁하는 성향을 보인다.
이런 역사적 전통이 21세기 한국에도 그대로 전이되어 지금 각 정당은 이념과 정체성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외신들은 한국이 ‘좌’로 더 가까이 간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좌파에 거부감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좌파보다는 개혁과 진보를 표방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쪽도 마찬가지다. 보수 정당의 이미지를 벗어나 중도개혁으로 탈바꿈하려 한다. ‘중도 진보’, ‘개혁 실용’, ‘개혁 보수’ 등 개념조차 혼란스러운 용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를 보는 국민은 불안하기만 하다. 우선 정당의 이념을 규정하는 용어 자체가 생소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펼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여당 당선자의 56%가 자신을 ‘중도 진보’라고 생각한다니, 분명 중도 진보적인 정책이 등장할 것 같기는 하다. 야당 또한 ‘건강 보수’, ‘중도 보수’ 등 새로운 이름 찾기에 여념이 없다. 게다가 국회에 처음 진출한 민주노동당의 색깔까지 가미한다면, 앞으로의 정책 방향은 더욱 불확실해진다.
물론 정치적 관점에서는 이념논쟁이 매우 중요한 화두일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 현안에 돌아오면 좌와 우를 둘러싼 이념논쟁은 진부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눈을 크게 뜨고 바깥세상을 내다보자. 사회주의와 선진국의 역사적 교훈도 살펴보자. 지금 이렇게 한가한 논쟁을 벌이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이념 타령으로 시간을 보낼 만큼 우리 경제가 여유롭지는 않다. 고용창출에 ‘중도 진보’냐, ‘개혁 보수’냐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국민은 왼쪽에 앉든, 오른쪽에 앉든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일자리를 늘리고 투자를 활성화해 내일의 잠재력을 확충하며, 국민경제를 회복시키는 정책을 고대하고 있다. 어떤 자리에 앉든지 개혁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하는 것이고, 목표는 글로벌 경쟁력 아니겠는가. 성장을 주장하면 우로 가는 것이고, 분배를 외치면 개혁으로 간다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면 실업과 신용불량자 투자부진 산업공동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분배를 개선하자는 개혁의 목표도 성장 없이는 달성될 수 없는 과제다. 성장이 모든 경제 현안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저성장은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에 훨씬 더 많은 고통을 준다. 개혁이 일자리를 줄이고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것이라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세계는 지금 생존경쟁 중인데…▼
경제를 살리려면 해외로 빠져나가는 투자를 붙들어야 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고 노사관계도 선진화해야 한다. 정치권은 이념논쟁으로 소일하고 정부는 낡은 패러다임으로 기업을 규제하면 경제는 어디로 가겠는가. 게다가 인기 위주의 정책으로 국민까지 현혹시킨다면, 경제는 더욱 암담해질 것이다. 지금은 애매한 수사(修辭)로 이념을 포장해 시장의 불확실성을 높일 때가 아니다. 개혁의 아집을 극복하고 나라가 살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세계는 모두 글로벌 경쟁의 풍파에서 생존게임에 골몰하고 있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해묵은 이념논쟁만 할 것인가. 이런 일에 어떻게 좌와 우가 따로 앉을 수 있겠는가.
정갑영 연세대 정보대학원장·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