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의무교육제 도입으로 취학률이 급격히 확대됐지만 교실과 교사는 태부족이었다. 1960년대 오전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교실 문 앞에 몰려선 서울의 한 초등학교 오후반 학생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의무교육 實施에 一大 癌 … 교사·교실 부족 해결 시급▼
문교 당국의 최근 집계에 의하면 지난 신학기에 수용된 적령(適齡) 아동 수는 당초 예상한 것보단 二십五만 명이 증가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교 당국에서는 이러한 반가운 현상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교실 부족 및 교사(敎師) 부족의 현상으로 희비(喜悲)가 교착되는 상태를 이루고 있는 바 정부에서는 금년도부터 의무교육실시 6개년계획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당국자가 말한 바에 의하면 교사를 보충하는 경비만 하여도 二억 환 이상에 달하는 부족액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는데 동 부에서는 기획처와 긴급조치책을 상의하여 의무교육 완전실시에 지장 없기를 획책하고 있다. 한편 당국에 보고된 교원부족수는 약 3000여 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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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의무교육 첫발▼
지금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 이뤄지고 있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초등학교 의무교육 완성’이 중요한 국가적 과제였다.
그 구상은 미군정 시절 시작됐다. 1946년 미군정은 5년 내에 학령아동 400만 명을 취학시키겠다는 의무교육 계획을 밝혔으나 예산부족으로 실시되지 못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교육법을 제정하고 1950년 6월 시행키로 했으나 역시 6·25전쟁으로 유야무야됐다.
1954년 정부는 1959년까지 취학률을 96%까지 끌어올리고 부족한 교실을 신축하겠다는 야심에 찬 의무교육 6개년 계획을 입안해 실시하면서 드디어 의무교육이 첫발을 내디뎠다. 그 결과 광복 직후 64%였던 초등학교 취학률이 1955년 90%, 1959년에는 96.4%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양적 팽창은 또 다른 문제들을 낳았다. 학생은 느는데 공부할 교실과 가르칠 교사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해마다 5000∼6000개의 교실을 신축키로 약속했으나 이는 전란으로 경제와 민생이 피폐된 상황에서 애당초 무리한 목표였다. 교사 부족으로 학급당 수용인원도 60명을 훨씬 넘었고, 3부제 4부제 수업을 강행한 학교도 적지 않았다. ‘취학률 96%’ 달성의 이면(裏面)에는 이렇게 열악한 교육여건이 있었다.
나아가 초등학교 취학률 확대는 다음 단계인 중고교의 치열한 입시경쟁을 낳기도 했다. 1968년 ‘중학교 무시험 입학’, 1973년 ‘고교 평준화’ 등으로 중고교 입시 지옥에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요즘 고교 평준화의 공과(功過)가 다시 논란이 되는 걸 보면 모든 일에는 한 가지 얼굴만 있는 건 아닌 듯하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