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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중국인가]정치권 ‘脫美親中’ 조짐

입력 | 2004-05-03 18:54:00


《최근 ‘중국 쇼크’가 계속되고 있다. 중국의 긴축경제 정책이 한국경제에 미친 충격이 경제적 측면의 쇼크였다면 전통적 우방인 미국보다 중국을 중시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인식 변화는 정치권발(發) 쇼크였다. 본보와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이 17대 총선 직후 초선 당선자 138명을 대상으로 대외정책에서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나라를 조사한 결과 중국(55%)이 미국(45%)을 제치고 ‘가장 중요한 나라’로 꼽힌 데 이어 열린우리당 자체 조사에서도 당선자 130명 가운데 63%가 ‘최우선 외교통상 상대국’으로 중국을 꼽았다. 이 같은 ‘중국 쏠림’ 현상의 실태와 허실을 3회에 걸쳐 점검한다.》

▽중국을 보는 정치권의 생각=지난달 28일 열린우리당 워크숍에서 당선자 130명을 대상으로 자체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중국 우선’이라는 답변이 63%나 나오자 당 지도부도 당황하는 분위기였다. 김근태(金槿泰) 원내대표는 부랴부랴 “이 수치는 미국이 가장 중요하다는 전제 아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운동권 출신을 비롯한 개혁성향의 의원과 당선자들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위상과 역할이 축소되는 만큼 한국의 대외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본보 취재진에 당당히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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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안영근(安泳根) 의원은 3일 “6·25전쟁 때 미국이 도와준 데 따른 보은(報恩)적 대미관계는 실리를 중시하는 젊은 세대에 맞지 않는다”며 “북한 핵문제나 남북관계 개선에 관해선 미국보다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고 잘라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소장그룹 내에서는 또 “미국을 활용한다는 용미(用美)론을 내세웠지만 과연 그동안 미국을 얼마나 잘 활용했느냐”는 비판의 소리도 있다.

보수성향의 한나라당 내에서도 이 같은 시각은 엄존한다. 박형준(朴亨埈) 당선자는 “한국 정부도 중국과 미국이 맞수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2020년이 되기 전에 동북아에서 미국 일변도의 외교에서 벗어나 다자주의를 지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반세기 동안 대외정책의 근간이었던 한미동맹의 재정립이 모색되는 최근 상황 속에서 이제 미국 대신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특히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내에 포진해 있는 386세대 참모진과 소장, 정치인의 의식구조 속에는 남북관계를 대외관계를 재단하는 잣대로 삼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결국 남북관계를 중시하는 사고의 틀 속에서는 미국보다 북한에 영향력이 큰 중국을 중시해야 한다는 시각이 나오는 것이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귀결이다”고 지적했다.

또 80년대 학생운동의 흐름을 관통했던 ‘반미 자주화’ 운동의 경험도 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미국보다 중국을 선호하는 성향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중국 쏠림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경남대 북한대학원 이수훈(李洙勳) 교수는 “군사 분야를 제외하면 ‘이빨이 무뎌진 호랑이’인 미국과 떠오르는 중심축인 중국에 쏟는 국력을 5 대 5로 유지해야 한다는 민심이 반영된 결과”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정치권의 견해와 여론이 한 방향인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한국이 처한 외교안보 경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급작스러운 ‘중국 쏠림’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려의 소리도 적지 않다.

중국 근무경험이 있는 한 중견 외교관은 “한미동맹이 깨지는 상황을 맞게 되면 한국이 중국과 손을 잡아보아야 그 순간 동북아의 외교적 미아(迷兒)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하이(上海) 총영사를 지낸 경창헌(慶昌憲) 전 대사는 한국의 중국 쏠림 현상이 명분도 실리도 잃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의리를 강조하는 중국외교의 특성상 갑작스러운 한미동맹 구도의 변화를 중국이 높게 평가하지 않을 것이란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대의 한 교수는 ‘친미(親美)-반미(反美)’ ‘중국축(軸)-미국축’ 등 이분법적 선택을 부각하려는 시도 자체를 경계했다. 그는 “일각에서 과거 관행을 거부하는 진보주의자로 자신을 채색하기 위해 반미-친중국론을 활용한다”고 우려했다.

▽중국 중시론 계속될까=정치권의 중국 사랑은 중국의 경제적 성장을 크게 주목한 측면이 강하다.

실제 중국은 2003년 한국 수출품의 20%를 사줬고, 한국에 130억달러의 무역흑자를 안겨줬다. 내수부진에 허덕이는 한국경제를 사실상 이끌어 온 셈이다.

그러나 ‘중국 러시’는 한국경제의 경쟁력 약화가 투영된 착시현상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지난해 한국의 대중국 수출은 전년도보다 48% 늘었지만 대미국 수출은 5% 증가에 그쳤다.

현오석(玄旿錫)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 소장은 “이러한 증가율 차이는 1등 상품끼리 한판 승부를 해야 하는 미국시장에선 한국기업이 무한경쟁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한국 브랜드가 통하는 중국에서는 마케팅에 성공했다는 의미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한중간에 경쟁력 역전현상이 나타날 2010년부터는 한국이 대중 교역에서 적자를 볼 가능성이 크다는 점. 현 소장은 “그때도 중국을 한국의 장래를 맡길 상대로 볼 것인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중국 중시파가 대거 증가한 17대 국회에선 한미동맹과 중국 중시 외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개연성이 크다. 결국 한미동맹이 어떻게 재정립되어나가는지, 또 한국이 중국에서 계속 경제 및 외교 안보적 실리를 챙길 수 있을 것인지에 따라 대외정책의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일반인들의 中美日 인식▼

중국에 대한 국민의 호감도는 전통적 우방인 미국과 일본에 대한 것보다 높았다. 특히 경제뿐만 아니라 외교안보 측면에서도 가장 중시해야 할 나라로 중국을 꼽는 국민이 많았다.

그동안 미국이 ‘(지리적으론) 멀지만 중요한 나라’, 일본이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면 어느덧 중국은 ‘가깝고도 중요한 나라’로 성큼 다가온 셈이다.

▽‘중국 중시’ 경향, 일반인이 정치인보다 더 강해=이번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앞으로 대외정책에서 미국보다 중국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최근 정치권의 견해에 압도적 지지(공감한다 84.0%)를 보냈다.

특히 외교안보 측면에서도 ‘앞으로 가장 중시해야 할 나라’로 동맹국인 미국(38.1%)보다 중국(48.3%)을 더 많이 꼽은 것은 주목된다. 이 질문에서 ‘중국 중시’ 응답은 20대(52.7%)와 30대(58.8%)에서 크게 높았다. 40대는 중국(44.3%)과 미국(41.3%)이 비슷했고, ‘50대 이상’만 미국(42.9%)이 중국(38.4%)보다 높았다.

미국 일본 중국 등 세 나라에 대한 ‘국가 호감도’ 조사에서도 중국은 ‘좋다’(28.0%)는 답변이 가장 높고, ‘싫다’(11.8%)는 응답은 가장 낮게 나왔다.

서울대 외교학과 정재호(鄭在浩) 교수는 “90년대 이후 한국민의 미국 호감도가 중국 호감도를 앞선 경우는 별로 없었다. 정치권의 최근 중국 중시 경향은 일반 국민의 중국에 대한 인식이 이제야 수렴되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고 말했다.

반면 세종연구소 이태환(李泰桓) 연구위원은 “‘중국 중시’를 꼽은 사람도 한미동맹을 경시해도 된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라며 “국가관계에 대한 주관적 선호도 조사는 ‘제3국’에 불필요한 외교적 오해를 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에 대한 복잡한 심리=이번 조사에서 동맹국인 미국은 사회문화 측면에서만 ‘가중 중시해야 할 나라’(31.7%)로 꼽혔고, 다른 두 분야에선 중국에 밀렸다.

그러나 ‘자녀에게 가장 가르치고 싶은 외국어’에선 영어(79.2%)가 중국어(14.6%)를 압도했고, ‘자녀의 장래에 가장 도움이 될 것 같은 유학 국가’에서도 미국(38.9%)이 유럽(27.0%) 중국(13.4%)보다 높았다.

한편 일본에 대해선 전 연령층에서 ‘싫다’가 ‘좋다’는 응답보다 높게 나타났다. 일본은 ‘자녀에게 가르치고 싶은 외국어’(2.8%)와 ‘자녀 유학 보낼 국가’(5.4%)에서도 상당히 낮게 나왔다.

▽중국은 ‘두려운 라이벌’=20대를 제외한 나머지 연령층에선 중국을 ‘파트너’라기보다는 ‘라이벌’로 인식했다. 20대에서만 라이벌(43.1%)보다 파트너(56.5%)라는 답변이 높았다. ‘화이트칼라’는 파트너(51.3%), 블루칼라는 라이벌(61.1%)로 보는 응답이 각각 많아 ‘중국의 경제적 위협’에 대한 직업별 체감도 차이를 보였다.

중국 전문가들은 “중국의 경제가 계속 급성장해 한국을 앞지르고, 그에 따른 실질적 피해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그동안의 반미 반일 감정과 비슷한 반중 감정이 본격적으로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