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면 이렇듯 아름다운 조명으로 장식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싱가포르 강변과 금융가. 오른 편 강둑을 줄지어 불밝힌 곳이 낡은 창고건물을 수리해 조성한 멋진 수변식당가 보트키다. 조성하기자
1819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 경이 무역선을 이끌고 와 싱가포르 강에 닻을 내렸을 때, 훗날 강둑에 들어설 창고가 모두 멋진 식당으로 변신한 지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테이블의 행렬로 야외식당가를 이룬 싱가포르 강변의 보트 키와 클라크 키. 거기서는 다양한 피부와 언어, 서로 다른 종교와 국적의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동서양 음식이 한테이블 위에, 아니 한접시 위에 뒤섞여 제공되는 ‘뉴 아시아’ 푸드를 먹는다. 퓨전(fusion) 푸드의 발상지 싱가포르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현장이다.
음식천국 싱가포르. ‘싱가포르 슬링’은 그것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도발적인 빨간 빛깔의 열대과일 칵테일. 개발한 이는 중국인, 탄생한 곳은 호텔 ‘래플스’의 ‘더 롱 바’다. 동서무역 중계지의 영국인 호텔에서 항구의 하역부로 일하던 화교가 흔한 과일을 재료로 영국인을 위해 만들어 세계적인 브랜드로 이름 굳힌 이 칵테일. 그래서 싱가포르 슬링은 그 자체가 싱가포르의 단면이요 역사다.
말레이시아 인도 중국 그리고 영국인이 한데 어울려 지내온 싱가포르의 지난 2세기. 종교와 피부, 언어와 태생이 다른 이들이지만 1965년 말레이연방에서 독립한 후 지금까지 내전 한 차례 없이 지내며 선진국을 이룬 아주 특별한 나라다.
싱가포르가 표방하는 ‘뉴 아시아’는 바로 이런 문화와 음식, 역사의 조화와 화합을 뜻하는 ‘퓨전’을 상징한다. 싱가포르를 동서 문화의 용광로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 동서양 다양한 퓨전 음식의 발상지
웰빙 바람과 더불어 점차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음식. 구어메(gourmet·식도락가)니 컬리너리 아트(culinary art·요리)니 퀴진(cuisine·음식)이니 하는 단어들이 빠르게 친숙해져 가는 요즘. ‘세계 식도락의 수도’ ‘음식천국’으로 불리는 싱가포르는 이제 새로운 각도에서 도전해 볼 만한 식도락 여행지로 다가왔다.
싱가포르에서라면 음식을 주제로 여행일정을 짜도 좋다. 호텔은 보트 키의 수변 식당이 바라다 보이는 싱가포르 강변의 ‘더 펄러톤’이 좋다. 옛 우체국을 개조한 이 호텔은 싱가포르 역사 그 자체다.
아침 식사는 싱가포르 스타일에 도전해보자. ‘야쿤카야’의 토스트와 커피 아니면 바쿠테가 있다. 옛 창고를 개조한 소박한 이 식당에서는 얇은 토스트 조각에 야자열매 잼을 발라 텁텁한 커피와 함께 먹는다. 체인점이 10여개나 되는 토속식당이다. 바쿠테는 돼지갈비를 푹 끓인 탕인데 전날 한잔했다면 해장국으로 그만이다.
프라나칸 음식도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다. 프라나칸이란 싱가포르 항에 일자리를 찾아 대거 진출한 화교가 원주민인 말레이시아 여자와 결혼해 이룬 가정을 말한다. 워낙 그 수가 많다보니 말레이반도의 독특한 문화로까지 발전했다. 말레이시아와 중국의 절충형 음식으로 퓨전 푸드의 원조라 할 만한데 우리 입맛에 딱 맞는다. 식당은 탄중파가 로드에 위치한 ‘블루 진저’가 제격이다.
저녁에는 클라크 키나 보트 키를 찾자. 강변의 창고가 모두 운치 있는 식당가로 탈바꿈했다. 보트 키의 수변 노천식당은 명물거리다. 강둑의 야외에서 식도락을 즐기며 고층건물의 야경도 감상한다.
○ 자극적 맛 ‘프라나칸’ 우리 입맛에도 딱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음식 이벤트인 ‘월드 구어메 서밋’(4월 19∼30일)에 초빙된 프랑스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루의 쉐프들. 조성하기자
식후에 분위기 좋은 바를 찾는다면 모하메드 술탄 거리로 가자. 펍(Pub·작은 바)이 일렬로 늘어선 곳으로 분위기는 점잖으면서도 활기차다. 밤 깊어 출출하면 야참 할 곳을 찾기 마련. 시내 곳곳의 호커 센터(Hawker Center)가 제격이다. 이곳은 일종의 푸드코트로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인도식 등 다양한 음식을 24시간 제공하는 싱가포르에만 있는 특별한 식도락 공간이다.
관광과 음식을 겸한 이벤트 식사도 많다. 가족여행자라면 아침에 오랑우탄과 함께 식사를 하는 동물원의 ‘정글 브렉퍼스트’를 권한다. 식후 코끼리열차로 동물원을 둘러보며 쇼(원숭이 북극곰 코끼리)도 본다. 주말 저녁에는 스카이 다이닝이 있다. 훼이버 산과 센토사 섬을 오가는 케이블카(왕복 20분)를 탄채 단 둘이 밤바다 상공에서 식사를 즐긴다(커플당 120싱가포르달러).
싱가포르에서 식도락을 즐기고 싶다면 4월과 7월의 식도락 축제를 권한다. 4월에는 ‘월드 구어메 서밋’, 7월에는 ‘싱가포르 푸드 페스티벌’이 열린다. 별별 맛있는 음식을 아주 파격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는 세계 최고의 식도락 행사라 할 만하다. 행사 홈페이지를 섭렵한 뒤 미리 예약을 해두지 않으면 멋진 행사에는 참가하기 어렵다.
싱가포르=조성하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