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밥 주고, 닭 모이 주고 뒷마당 작은 밭 새싹들도 요리조리 살피고, 좀 더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는 뒷산에 올라 하늘과 땅과 나무들과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고…. 경기 여주군 가남면으로 이사한 뒤 아침은 으레 이렇게 시작된다. 가끔 논두렁 사이를 시원스레 나는 백로를 볼 때면 ‘이렇게 사는 거구나’ 하며 작은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주변에서 “멀지 않아요?”, “아이들 공부는?” 하고 걱정스럽게 묻지만 이젠 일일이 답하기보다 ‘허허’ 웃고 만다. 서울의 잘나가는 동네에서 아등바등 아이들 학원 보내며 소위 남부럽지 않게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시골로 덜컥 이사를 해 버렸으니 여러 이야기가 있을 법도 하다. 우리 가족은 더 없이 행복하기만 한데 말이다.
정부기록보존소 공무원으로 역사 공부에 열심이다가 1999년 대학원이 신설되면서 기록학이라는 학문을 열어 가야 한다며 교수로 취직하던 무렵, 명함을 건네면 “이런 학과도 있어요?” 하고 묻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차를 바꿨느니, 너무 튄다느니 하는 동료 선배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기록에 한해서는 참담하기조차 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논하며 치열하게 기록학 이론에 매달려 대안을 모색하는 연구자들, 대학원생들과 가슴 뜨겁게 만나다 보면 그런 시선을 의식할 여유가 없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 조금 특이할 수도, 또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기록학 지식공동체는 지금 이 순간도 미래를 향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돌이켜 보면 20여년 전 대학 초년생 시절부터 나의 행복한 삶,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 살아 왔다. 때로는 민주주의라 불렀고 때로는 사랑이라고도 생각했으며, 돌을 던지기도 하고 또 미친 듯이 공부하기도 했지만 결국 꿈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실한 선택에 의해 조금씩 이뤄진다는 내 식의 진리를 깨치게 된 것 같다. 끊임없이 내게 주어진 선택의 기회마다 부모, 아내와 아이들, 이웃을 생각하며 거짓 없이 대응해 왔던 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음에 틀림없다.
사회운동에 흠뻑 젖어 있다가 학문의 길을 택한 것, ‘역사’를 하다가 미래야 어찌되건 ‘기록’이란 화두를 끌어안고 살아 온 것, 서울을 떠나 이곳 여주를 택해 우리 가족 모두가 자연과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그 모든 것이 그렇다.
다시 어떤 변화를 겪고 어떤 위기에 봉착할지 모르는 시골생활이지만 이곳에서 행복한 삶의 꿈을 이뤄 보려고 한다. 시간 나는 대로 ‘1마을 1공원화’를 위해 애써 보고 싶기도 하고, 없어진 대동회 때의 마을놀이도 다시 일으키고 싶고, 사랑하는 두 아들이 더 이상 제도와 어른들의 욕심에 휘둘리지 않게 하고 싶다. 이제 시작이기는 하지만 기록학의 철학과 방법론을 세우고 진정한 기록 전문가를 키워 우리 사회의 참담한 기록 관리 현실을 타개해 가리라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기록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책임지고, 기록을 통해 지식을 공유하는 최소한의 절차적 합리성이 머지않아 우리 사회에 정착될 것이라는 점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 익 한 명지대 기록과학대학원 교수·기록학
약력:△1960년생 △서울대 국사학과 △도쿄대 대학원 문학박사 △정부기록보존소 전문위원 지냄 △한국기록학회 총무이사 △디지털기록정보연구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