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거주 외국인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극단 서울 플레이어스 단원이 영어연극 ‘코시’의 리허설을 하고 있다. 국적도, 직업도 다르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 하나만은 똑같다. 오른쪽 사진은 무대에 설치할 시설물을 점검하는 극단 설립자 로만 졸니르직(왼쪽)과 연출자 탈리 메인.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옆집 사는 외국인이 연극을 한다? 서울 거주 외국인 10만 시대.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서울 플레이어스.’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극단이다. 직업은 주부, 직장인, 영어 강사, 공무원 등 다양하다. 배우는 아니지만 연극에 대한 열정은 그에 못지않다. 2001년 극단 결성 이래 매년 두 편씩 영어연극을 공연해 왔다. 이번에는 서울 홍익대 앞 예병원 지하 소극장(마포구 서교동)에서 그들의 다섯 번째 작품 ‘코시’를 공연 중이다. 6일부터 열흘간 평일 오후 8시, 주말과 공휴일 오후 3시 8시 등 모두 12회 공연이다. 낯설고 물 선, 게다가 영어 의사소통이 불완전한 한국에서 영어연극을 하려는 외국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연극 안의 연극 ‘코시’
“다들 멈춰요! 그래서 어떻게 한국인 관객에게 연극을 전달하겠어요? 관객이 영어대사를 못 알아듣더라도 표정과 액션으로 분위기를 전해야죠. 자, 감정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1일 오후 연극 연습이 한창인 홍익대앞 소극장. 이번 공연의 총연출을 맡은 미국인 학원강사 탈리 메인(23·여)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실려 있다. 모두가 주말에만 연습할 시간이 나는 직장인인 탓에 이번이 마지막 연습이다. 3개월을 준비했지만 아직도 그에겐 부족해 보인다.
발을 동동 구르며 ‘진짜’ 연기를 요구하는 그의 앞에서 8명의 ‘배우’가 갖은 표정을 지어 본다. 그 옆에선 조명 의상 등을 맡은 스탭 7명이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다.
이들이 공연하는 연극은 영어로 된 호주 연극 ‘코시’. 연극 안에 또 다른 연극이 펼쳐지는 액자식 구성작품이다. 모차르트의 희가극 ‘코시 판 투테’를 공연하려는 정신병동의 젊은 신참 의사와 환자 7명이 좌충우돌을 겪는다는 내용. ‘여자들은 다 그래’라는 뜻의 ‘코시 판 투테’는 두 자매를 각각 사귀는 사관학교 동료 두 남자가 자기 연인의 절개를 시험하기 위해 전쟁에 징병된 것처럼 꾸미고 상대의 연인을 유혹하는 내기를 한다.
“사랑하는 연인이 곁에 없을 때 매력적인 다른 사람의 구애를 받는다면 어떻게 할래요?”
“글쎄요. 그게 내 일이라면….”
극 중 대사이기도 한 이 질문은 연극의 핵심이자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남녀간의 신뢰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 애정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다양한 성격장애 환자들을 통해 인간 내면에 감춰진 본성을 파헤치는 코미디다.
○ 다국적 배우들의 연기대결
이 연극에서는 각각의 캐릭터가 모두 처한 상황이 다르다 보니 주인공이 따로 없다. 그 때문에 국적도 다르고 참가 이유도 다른 각자가 ‘자존심’을 걸고 한판 연기 대결을 벌인다.
‘열혈 이탈리아인’을 자처하는 제시카 파파스(37·여)는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로 상대역들을 당혹케 했다. 의사를 유혹하는 환자 역을 맡은 그가 너무 노골적으로 몸을 붙이고 뇌쇄적인 눈빛을 보내자 상대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나머지 웃음을 터뜨렸다.
서울에서 자녀들을 키우느라 변변한 문화생활을 하지 못했던 그는 이번 무대에서 ‘한풀이’에 가까운 적극성을 보였다.
아멜리에 주버트(24·여·프랑스 대사관 직원)는 깐깐한 프랑스인 기질대로 아예 극중인물에 빠져있다. 강박관념증 환자 역을 맡은 그는 시종일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주변이 소란스럽거나 모두가 웃는 상황이라도 표정엔 변함이 없다. 한국 임기 2년을 마치고 귀국을 앞둔 그는 이 극단에 세 번 도전한 끝에 간신히 배역을 얻었다.
대학 영어 강사인 미국인 드니스 라인하트(30·여)는 이번이 두 번째 출연. 대학에서 영어연극 소모임을 이끌고 있는 그는 무대에 서서 고민하는 시간이 가장 길었다. 연극을 보러 올 학생들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시선처리 하나에도 세심한 연구를 하기 때문.
호주에서 온 초등학교 교사 매트 멀론(25)은 연극 연습을 위해 새벽 6시에 경기 용인시의 집을 나섰다.매주말 ‘출근은 첫째, 퇴근은 꼴찌’ 생활을 한지도 3개월. 체력이 바닥날 때도 됐지만 호주작품을 호주인이 가장 못한다는 소리만은 듣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 외국인 10만 시대, 서울의 문화
서울 플레이어스의 ‘코시’ 공연 포스터. 이 연극은 6일부터 16일까지 서울 홍익대앞 예병원 지하 소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극단을 처음 기획한 로만 졸니르직(45)은 호주 출신의 평범한 외국계 무역회사 직원이다. 그는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이 즐길 만한 문화가 별로 없다는 생각에 2001년 가을 극단 단원을 모았다. 기껏해야 4∼5명이 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일주일 만에 30여명의 희망자가 몰렸다. 서울에 있는 외국인들이 얼마나 문화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연극에 참가한 이들은 하나같이 “서울에는 거주 외국인 수에 비해 이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너무 적은데다 영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공연도 거의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 외국인들을 위해 소규모로 연극을 시작했지만 점차 한국인 관객까지 몰려 지난해 공연 때는 2000여명이 찾아왔다. 아마추어 영어연극치고는 꽤 성공적인 편이다.
최근엔 입소문이 외국에까지 나면서 이곳에서 공연할 목적 하나로 한국에 온 사람들도 있다. 2002년 공연에 참가했던 배우지망생 데이비드 옥센브리지(31)는 이번에도 뉴질랜드에서 날아왔다. 보수도 없는 자원봉사 무대지만 1인3역을 맡고 아무도 없는 주중에도 혼자 연기연습을 했다.
아직은 정식 배우도, 공식 스폰서도 없이 단원들이 비용을 갹출해 공연하는 아마추어 극단. 하지만 100여명의 외국인이 연극을 하고 싶어 대기 중인 ‘서울 플레이어스’는 분명 서울의 문화를 다채롭게 만드는 한 구성요소임에 틀림없다.
문의전화 (02-762-0688 또는 011-787-1826)
김재영기자 jay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