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한국 대다수 신문은 1면에 고종 황제의 가족사진을 실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왕의 11번째 아들인 이석씨(63)가 소장한 것으로 지금까지 공개된 적이 없다는 설명이 붙었다.
사진 속의 인물은 왼쪽부터 의왕(의친왕), 순종, 덕혜옹주, 영왕(영친왕), 고종, 순정효황후, 의왕비, 의왕의 장남 건이다. ‘1915년경 영왕의 일시귀국을 기념해 창덕궁 인정전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씨의 말이 덧붙여졌다.
다음날 인터넷 사이트 ‘도깨비뉴스’에는 ‘사진에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는 한 컴퓨터그래픽 전문가의 글이 근거자료와 함께 올랐다. 그리고 한국사진사연구소의 최인진 소장도 황실 사진으로서의 의문점을 제기했다.
의문의 발단은 사진에서 영왕의 위치나 빛의 방향이 어색하다는 점이었다. 위크엔드팀은 그 타당성을 검토해 보았다. 》
○ 의문의 황실 사진
한국사진사연구소 최인진 소장은 이 사진(이하 A사진)의 인물 배치가 황실의 규범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즉 태왕(太王), 왕, 왕세자의 순에 따라 고종 순종 영왕 순으로 서고, 의왕은 아무리 손위라고 해도 영왕 옆에 서야 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고종 순종 의왕 순이고 영왕은 순종과 고종 사이 뒤쪽에 몸도 다 나오지도 않은 채 서 있다. 이 배치를 영왕이 1918년 귀국해 고종 순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와 찍은 사진(이하 B사진)과 비교해 보자.
1918년 영왕(맨왼쪽)이 귀국한 뒤 덕수궁 석조전에서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왼쪽부터)와 찍은 기념사진. 출처는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B사진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뒤 귀국한 영왕이 그해 1월 20일 고종 등과 함께 덕수궁 석조전에서 일본 요리를 시식한 기념으로 찍은 것이다. B사진의 인물 간격은 아주 균등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A사진 속 인물 간격은 들쭉날쭉하다. 오히려 왕비들이 왕들보다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황실의 법도를 따른다면 의왕비를 빼고라도 영왕에게 충분한 공간을 줘야 맞는다는 것이다.
만약 영왕을 사진에서 없애고 덕혜옹주와 의왕의 아들 건을 무시한다면 사진 속 인물 5명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매우 정상적인 황실 사진으로 보인다.
최 소장은 두 번째 의문으로 배경이 너무 검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존의 황실 사진 가운데 배경이 나오지 않은 사진은 없었다는 것이다. 최 소장은 아주 조심스럽게 “배경이 검다는 것은 몽타주(편집)의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사소한 점이지만 ‘창덕궁 인정전’이라는 촬영 장소도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고종은 아관파천(1896) 이후 서거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살면서 창덕궁에 사는 순종의 문안을 받았다.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고종이 창덕궁으로 거둥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 영왕은 어디 있었나
또 하나의 의문은 영왕(1897∼1970)이 사진 촬영 당시 조선에 있었느냐는 점이다.
덕혜옹주는 고종(1852∼1919)이 환갑을 맞은 1912년 5월 25일 후궁인 양귀인(梁貴人)에게서 본 외동딸이다. A사진 속 덕혜옹주가 1∼3세라고 본다면 사진은 1913∼1915년경에 찍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영왕은 그때 어디 있었을까.
①1908년 영왕이 일본 도쿄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찍은 사진.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②매일신보 1917년 12월 25일자에 실린 영왕의 육군 소위 임관 때 모습. ③1919년 고종 붕어 후 급히 귀국한 영왕.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07년 왕세자가 된 고종의 일곱째 아들 영왕은 그해 12월 5일 이토 히로부미를 따라 일본 유학을 떠난다.
1981년 김을한의 ‘인간 영친왕’과 1998년 송우혜의 ‘마지막 황태자’에는 영왕이 1911년 7월 생모인 엄비가 숨졌을 때와 1918년 1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을 때, 두 차례만 조선에 왔다고 돼 있다.
위크엔드팀은 1913∼1915년 영왕이 조선에 돌아왔다는 보도가 있는지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를 조사했다. 매일신보는 ‘순종이 고종을 문안하러 갔다’거나 ‘영왕이 후지산 등정에 성공했다’ 등 시시콜콜하게 황실의 동정을 전했던 신문이다.
1913년 5월 28일 영왕은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를 수료하고 6월 1일 본과에 진급한다. 9월 고종의 탄신일에는 직물을 선물로 보냈다.
1914년 5월 24일에는 일본 소헌황태후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7월 21일에는 소헌황태후 백일제에 참석했다. 9월 고종의 탄신일 보도는 있지만 영왕이 참석했다는 내용은 없다.
1915년 5월 28일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했다. 9월 고종 탄신일 축하연이 덕수궁에서 있었다는 보도는 있지만 역시 영왕의 참석 소식은 없다.
그리고 1918년 1월 13일 영왕이 조선에 돌아왔을 때 매일신보는 ‘8년 만에 귀선(歸鮮)’이라고 제목을 뽑았다. 1911년 이후 햇수로 8년이라는 뜻이다. 덕혜옹주 6세 무렵이다.
이 같은 기록을 토대로 한다면 영왕이 A사진에서 어린 덕혜옹주와 함께 있는 것은 어색하다.
○ 증명하기 어려운 의문들
이 밖에도 다른 사람과 영왕에게 비치는 빛의 밝기와 각도 그리고 명암의 형태가 다른 점, 영왕의 신체 크기를 추정했을 때 다리가 너무 짧은 기형적인 몸이 된다는 점, 그리고 영왕과 고종 순종 의왕의 시선이 확연히 다른 점 등의 의문이 제기됐다.
이런 의문은 증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사진이 원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달 23일 신문에 실린 이 사진은 원본을 다시 확대해서 찍은 가로 35.5cm, 세로 25cm 크기의 복사본이다.
이석씨는 가로 15cm, 세로 10cm 정도 크기의 원본을 미국에 살던 사촌형에게서 1980년대에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1998년경 사진작가 허종태씨에게 의뢰해 당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허스튜디오’에서 표구를 위해 확대 복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본은 이씨가 미국 체류 중이던 1990년대 후반에 도둑맞았다. 원본을 보았을 허종태씨는 1998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허씨의 유족 및 그와 함께 허스튜디오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허씨가 그런 작업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만약 이씨가 분실한 원본이 몽타주된 사진이었다면, 즉 영왕의 모습을 집어넣은 사진이라면 누가 왜 그랬는지 의문이 남는다. 도깨비뉴스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일제의 조작이 아닐까’라고 했지만 동기가 희박하다. 그렇다면 고종의 완결된 가족사진을 남기고 싶어 한 황실 후손의 애틋한 마음이었을까.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