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가 생각 없이 입을 놀린 죗값을 어마어마하게 치러야 했던 영화 ‘올드 보이’(DVD·스타맥스)에서 처음, 중간, 마지막에 세 번 되풀이되는 말이다.
오대수가 감금된 방의 벽엔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가 예수를 그린 그림 ‘슬퍼하는 남자’가 걸려있고 거기에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도대체 왜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갇힌 남자가 15년간 매일 대면하는 충고치고 얼마나 기가 막히는 말인가. 울어도 시원치 않은데 미치기 일보직전인 사람에게 웃으라니. 무지막지한 조롱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새겨들을 말이기도 하다. 거기서 울어본들 뭐하겠는가. 오대수가 풀려난 뒤 이 말은 그가 살아가는 태도가 된다.
옥상에서 투신자살하려던 남자를 살려놓고도 그 남자가 자기 사연을 털어놓으려 하자 매정하게 뒤돌아섰고, 자신을 덮친 비극의 전말이 드러나는 한 순간을 제외하고 그는 끝까지 ‘슬퍼하는 남자’처럼 눈은 울어도 입은 웃는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때마다 이 대사는 계시처럼 내레이션으로, 앨범에 적힌 글로 반복된다.
‘올드 보이’에 쓰이기 전부터 영문 속담집에 곧잘 실리곤 했던 이 말은 원래 19세기 시인 엘라 윌콕스가 쓴 시 ‘고독’의 첫 구절이다.
박찬욱 감독에게 물으니 시나리오를 쓸 땐 그게 시인 줄 몰랐다고 한다. 몇 년 전 유럽의 한 도시에서 커피를 마시다 머그 컵에 새겨져 있던 그 말을 처음 봤는데 “흔해 빠진 경구 같으면서도 냉소적인 뉘앙스가 기억에 남아” 영화에 쓰게 됐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가 세상의 상식인데 이 말은 ‘기쁨은 나눌 수 있어도 슬픔은 나눌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하긴 슬픔은 고사하고 기쁨조차 나누기 어려울 때도 얼마나 많은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남의 행, 불행을 엿보며 비교를 근거로 위안을 얻고 또 비교를 근거로 불행해지는 게 사람들이다. 그래서 시니컬한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브뤼크네르 같은 이는 “남의 불행을 애통해 하는 것보다 남의 행복을 함께 즐기는 것이 더 고결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내가 타자일 땐 남의 슬픔을 나누려는 연민은 가질 수 있어도 내가 고통의 당사자일 땐 슬픔은 나누기 어렵다. 영화 ‘문라이트 마일’(DVD·브에나비스타 코리아)에서 딸을 잃은 엄마 조는 남편에게 “누가 위로해도, 위로하지 않아도 화가 난다”고 쏘아붙인다. 슬픔으로 마음의 빗장을 닫아 건 그에게 남의 위로는, 험한 일이 자신들에게 닥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자들의 값싼 동정으로 느껴질 뿐이다.
제 손으로 눈물을 닦을 준비가 된 후에야 위로도 굴절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 전까진, 우는 사람은 철저히 저 혼자다. 그러니 행여 ‘왜 나만…’하는 자기연민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거든 이 싸늘한 조언,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를 되새겨보는 것도 스스로를 다잡는 데 도움이 될는지 모른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