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에너지 질서가 변하고 있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의 원유 수요가 증가하고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결속력도 예전보다 강해졌다. 최근 중동을 둘러싼 열강들의 이해 다툼이 치열하다. 올 들어 국제유가가 연일 상승세를 보이는 것은 석유가격 결정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본보는 국제 석유시장을 분석하고 한국의 에너지전략 방향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3회에 걸쳐 싣는다.》
1980년대 중반 이후 20여년간 지속된 저(低)유가체제가 와해되고 있다. 석유시장을 지배하는 양대 기둥인 경제와 정치 양쪽에서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우선 경제적 측면에서는 수요와 공급 구조가 바뀌고 있다. 정치적인 측면은 변화가 더 크다.
이라크전쟁 이후 중동지역 정세가 혼미해지면서 석유를 축으로 한 국제 에너지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중동에는 확인된 세계 석유 매장량의 70%가 묻혀 있다.
정치와 경제 부문의 변화는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국제 에너지질서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석유패권을 차지하려는 열강들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저유가체제를 지탱한 구조=1986년부터 1999년까지 저유가시대가 지속된 것은 우선 1차, 2차 오일쇼크를 야기했던 OPEC 국가들의 결속력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탐사기술의 발달로 80년대 중반부터 북해 및 멕시코 유전 등 비(非)OPEC 국가들의 석유생산량이 크게 증가하면서 OPEC의 가격지배력은 약화됐다.
또 선진국은 석유 의존도를 낮췄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안보와 석유 값 안정’이라는 거래관계를 지속했다. 산유국이 모여 있는 중동의 정치질서도 상대적으로 안정을 유지해왔다. 미국은 자원민족주의의 성향이 강한 이란과 이라크가 중동의 다른 국가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중동지역에 큰 관심을 쏟았다.
▽똑똑해진 OPEC와 중국의 등장=저유가체제는 2000년 3월 OPEC가 목표 유가제를 도입하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베네수엘라는 좌파인 우고 차베스 정권이 출범한 이후 고유가와 감산을 주장하고 나섰고 채무국으로 전락한 사우디아라비아 등 온건 산유국들도 맞장구를 쳤다. 2차 석유파동 때 유가가 배럴당 40달러까지 올라갔고 그동안의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30달러대는 고유가가 아니라는 것이 산유국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유가를 배럴당 22∼28달러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면 생산량을 줄이기로 했다. OPEC는 2000년 이후 13차례 쿼터를 조정했다. 이때마다 유가는 올랐다.
푸르노모 유스기안토로 OPEC 의장은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현재 배럴당 22∼28달러인 유가목표 수준을 최소 32달러까지 상향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OPEC는 1, 2차 오일쇼크와 저유가시대를 거치면서 지나친 고유가와 저유가도 자국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는 사실과 OPEC 내 카르텔이 깨질 경우 산유국 모두가 손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한국석유공사 연구조사팀 이준범 과장)
또 80년대 OPEC 체제를 무너뜨린 북해유전이 고갈되고 있고 제2의 중동으로 주목받는 카스피해나 중앙아시아의 유전 개발이 늦어지는 것도 OPEC의 시장 지배력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원자재 블랙홀’ 중국의 고속성장도 고유가를 부추기고 있다. 중국은 2002년부터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원유 소비국이 됐다. 하루 약 550만배럴을 쓰는 중국의 작년 석유수요 증가율은 세계 전체 증가율(1.9%)의 5배인 11%였다. 인구 10억의 인도마저 고속성장을 하고 있어 석유수요는 더욱 빠르게 늘 전망이다.
석유 선물시장에 투기자본이 대거 유입된 것도 고유가를 부채질하는 요인이다. 알 나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은 “투기자본이 배럴당 4∼6달러를 가져간다”고 말했다.
▽위험 프리미엄의 증가=최근 고유가에는 중동 정세의 불안에 따른 위험 프리미엄이 상당부분 포함돼 있다.
지난해 5월 이라크전이 끝난 뒤 국제유가가 일시적으로 하락했지만 이라크 정세가 복잡해지면서 유가는 다시 큰 폭으로 뛰었다.
이라크는 확인된 매장량만 1125억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2618억배럴)에 이어 세계 2위의 매장량을 갖고 있다.
미국이 희망하는 대로 이라크에 친서방정권이 들어설 경우 석유 값이 안정될 가능성이 높지만 현재 앞날을 점칠 수 없는 상태.
“미국은 준비도 없이 이라크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중동 정세가 악화될 경우 국제 석유질서는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갈 것이다.”(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백근욱 연구위원)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세도 불안하다. 석유 값을 안정시켜주는 대가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왕정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던 미국의 시각이 9·11테러 이후 바뀌고 있다.
알 카에다 대원 중 상당수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고 조직의 자금줄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들에게서 나온 사실이 확인되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복잡해지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작년 말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이 흔들리면서 발생할 사우디아라비아발(發) 에너지 위기를 경고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경제안보팀 김현진 수석연구원은 “중국발 에너지 위기의 가능성도 크다”고 경고했다.
석유위기를 겪어보지 않았고 석유비축량이 7일치에 불과한 중국은 유가가 크게 오르면 민간부문이 공황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중국정부는 가격과 상관없이 필사적으로 석유 확보에 나서 가격 폭등은 물론 국제정치 질서 자체가 불안해질 수 있다는 것.
최근 국제에너지기구(IEA) 등 에너지 전문 기관들이 일제히 석유 시장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경제 변수에 정치 상황이 결합되면서 생길 수 있는 불안정성 심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김용기기자 ykim@donga.com
▼한국경제 油價따라 출렁▼
한국은 고유가 체제에 취약한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한국의 에너지 해외의존율은 97.1%로 매우 높은 편이다. 정치적 위험도가 가장 높은 중동에 대한 석유 의존도는 73.4%에 이른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제유가가 1달러 상승하면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는 7억5000만달러 감소하고 경제성장률은 0.1%포인트 하락한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열강들이 에너지 문제를 경제안보뿐만 아니라 국가안보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지만 한국은 이런 인식이 미약하다는 지적이다.
국방연구원 김재두 연구위원은 “청와대는 물론 외교와 국방을 책임지는 부서나 연구기관에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전문가가 없다”고 말했다.
반면 석유의 중동의존도가 한국처럼 높은 일본은 총리가 직접 에너지정책을 주관한다.
일본은 그동안 해외유전 개발에 501억달러를 투입했다. 이 가운데 정부가 200억달러를 부담했다. 일본은 해외에 개발한 유전에서 석유의 약 15%를 자급하고 있다.
한국은 해외유전 개발에 총 45억달러(정부 9억8000만달러)를 투자했고 석유 자급률은 2%에 불과하다.
강대국들은 국가 차원에서 석유와 에너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석유시장이 경제논리로만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석유는 수요와 공급이 모두 비탄력적이다. 작은 변화가 생겨도 가격은 크게 요동친다.
석유는 수급에 문제가 생기면 국가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석유시장에 국제정치와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외교안보연구원 이재승 교수는 “오랫동안 저유가체제가 지속됐고 냉전체제 아래 국제 에너지 질서를 주도한 미국과 포괄적인 동맹관계에 있던 한국은 독자적인 에너지 안보전략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며 “이제 포괄적인 국가 에너지전략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우선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한미간 포괄적인 동맹관계가 이슈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는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 또 미국이 한국의 에너지 안보를 전적으로 책임지기에는 한국의 석유 수입규모가 너무 크다.
한국의 석유 소비량은 세계 6위, 수입량은 세계 3위다. 하루 석유소비량이 228만배럴이나 돼 국제 에너지 질서에 혼돈이 생기면 한국은 1, 2차 오일쇼크 때보다 훨씬 큰 영향을 받게 된다. 1차 오일쇼크 당시 한국의 하루 석유소비량은 23만배럴 규모였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