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출간에 맞춰 잠시 중국에서 귀국한 김연수씨. 청춘 시절 곳곳을 돌아본 이야기와 옛 문장들을 이어본 이번 산문집에서 그는 이백의 ‘장진주’ 한 구절을 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했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황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흘러흘러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박경모기자 momo@donga.com
◇청춘의 문장들/김연수 지음 /244쪽 9000원 마음산책
지난해 동인문학상을 받은 작가 김연수씨는 올해 서른다섯 살이다. 그는 자기 삶의 절반 무렵을 살고 있고, 전환점을 돌고 있다는 생각인 것 같다. 이 산문집의 시작은 조선 후기 학자 이용휴의 글을 옮겨온 것인데, 이렇다.
“옛날 한 사람이 꿈에 미인을 봤으되 얼굴의 반만 볼 수 있었다. 나머지 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병이 되었다. 누군가 그에게 ‘나머지 반은 이미 본 반과 같다’고 말해 주자 그제서야 울결이 풀렸다.”
김씨는 이제껏 살아온 자기 삶을 ‘미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경북 김천의 빵집 아들로 자라나 천문학과를 지망했으나 비슷한 ‘문학’ 계열인 영문학과를 다녔고, 산봉우리 하나에 5만명이 몰려 살던 서울 정릉동 산비탈 마을에서 자취했던 삶이었다.
이 시절 이야기를 작가는 여러 편의 산문에서 회고하고 있는데 마치 6·25전쟁 직후의 피란민 생활을 연상시킨다. “연탄불을 지폈는데 기다려도 온기가 없었다. 살펴보니 주린 시궁쥐들이 온수 호스를 다 갉아먹은 것이었다.”
그는 지나 놓고 보니 이 겨울이 사실은 자기 인생의 봄이었으며, 그렇게 깨닫게 해 준 시가 두보의 ‘곡강 이수(曲江二首)’였다고 한다. ‘한 조각 꽃이 져도 봄빛이 깎이거니/바람 불어 만 송이 흩어지니 시름 어이 견디리/스러지는 꽃잎 내 눈 스침을 바라보면/많이 상한 술이나마 머금는 일 마다하랴.’
그의 서른다섯 해는 희로애락으로 젖어 있었지만, 그의 글은 그것을 아름답게 반추하고 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대대장 ‘식모 노릇’을 했던 군대생활, 김광석 노래에 흠뻑 빠졌던 대중음악평론가 생활, 박봉성 만화에 빠져 만화방 소파에서 잠들었다가 검문 나온 형사의 눈 아래 잠이 깼던 일, 퇴근 후 새벽 무렵까지 소설을 썼던 습작 초기, 삼남매를 세상으로 이끌었던 어머니가 자궁암 수술을 위해 입원하자 눈물로 지새웠던 며칠간의 병실생활, 그리고 딸 열무를 자전거 앞 아기 의자에 태우고 달렸던 여름날….
그는 “내가 사랑한 시절들, 사랑한 사람들, 내 안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들, 지금 내게서 빠져 있는 것들을 썼다”고 밝혔다. 그는 그 가냘프되 빛나는 기억의 편린들을 짧고도 울림이 큰 옛 문장들로 연결짓고 있다. 그것은 이백과 두보와 소식과 사공서의 시, 이덕무와 정약용과 윤치호의 문장, 이시바시 히데노의 하이쿠(俳句), 오마르 하이얌의 시집인 ‘루바이야트’에서 나온 ‘청춘의 문장들’이다.
이 같은 인용문 곳곳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삶은 전남 강진의 유배지에서 500권의 책을 썼던 다산 정약용, 그림 그리기에 일생을 걸어 자기 눈까지 찔렀던 조선 후기 화가 최북의 삶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며 그 어느 한 방향으로 수렴돼 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지난 반생과 앞으로 닥쳐 올 반생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어떤 지점이다. 그 균형을 잡기 전까지 그는 ‘빛나게 번뜩이는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곳’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야 할 운명인 듯하다.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 만철(滿鐵)의 기사로 일하다가 항일유격대로 나아가는 한 청춘을 그리는 신작 ‘밤은 노래한다’를 쓰기 위해 지난해부터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에 머물고 있다.
‘밤이 얼마나 지났는가. 아직 절반도 못 되었네/뭇별들이 눈부시게 빛을 내누나/깊은 산 그윽한 골짜기 어둡기만 한데/그대는 어이해 이 고장에 머무는가’-김시습의 ‘밤이 얼마나 지났는가(夜如何)’ 중에서.
권기태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