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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고독과 鄕愁가 붓을 만났을때…在獨화가 노은님

입력 | 2004-05-09 17:26:00

화가 노은님은 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중년 아줌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맑고 밝고 천진해보이는 그녀의 웃음에선 ‘척’이나 ‘체’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삶과 그림의 본질을 질문해 온 순수함이 배어난다. 자신의 웃음처럼 밝고 환한 작품 ‘O.T,2003‘ 앞에 서 있는 작가. 김동주기자


얼핏 촌스러워 보이는 패션에 뚱뚱한 체구, 굵은 파머 머리…. 화가 노은님(59)은 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중년 아줌마의 이미지가 강했다. ‘노. 은. 님’이라는 이름 석 자에서는 연약함과 다정함을, 대담한 화면에선 활달함을 연상했지만 정작 작가는 차가웠고 수줍음이 많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맑고 순박하고 천진해 보였다. 그녀의 웃음에선 (예술가인) ‘척’이나 ‘체’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삶과 그림에 대한 본질을 물어 온 순수함이 배어났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화가 노은님의 ‘다시 오는 봄’ 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의 전시장은 작가가 캔버스에 펼쳐놓은 밝고 순수한 에너지로 가득하다.

○ 간호보조원에서 교수로

그녀가 하늘의 새, 바다 속 물고기, 나무와 꽃 등 봄을 맞은 동 식물을 소재로 한 작품 90여점에는 과감한 생략과 명징한 색채, 동화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물, 불, 공기, 땅의 4대 요소를 주제로 생명체로서의 동 식물을 직관에 따라 그렸다는 이 그림들에선 또 유머와 따뜻함과 낙천성이 배어 있다. 수사와 부연을 배제한 단순미의 극치에선 도가적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장미 사람’(2003년), 138×166㎝

노은님의 그림 그리기는 ‘놀이’ 같다. ‘색동물고기’ ‘하얀 물고기’ ‘걸어가는 해’ ‘하늘의 다리’ ‘봄나들이’라는 작품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제멋대로이고 장난기 가득하다. 그런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가슴 한켠이 묵직해진다.

○ 유럽 화단서 ‘그림의 시인’ 호평

베를린 자유대학 동양미술사학과 이정희 교수는 “그녀는 의미 없어 보이는 생명체에 날개를 달아주어 별과 달 사이를 여행하게 하거나, 물고기로 만들어 무한한 바다를 떼 지어 헤엄치게 한다”며 “이런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 속에서도 고뇌를 느낄 수 있는 진실하고 깊은 맛이 노은님의 힘”이라고 소개했다.

먹고 살기 위해 간호보조원으로 독일로 건너간 지 34년. 이제 노은님은 붓 하나로 국제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모르는 이들은 운이 좋다고 하지만 그녀는 사실 누구보다 신산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밤색, 초록물고기’(2003년), 150×212㎝

반벙어리 독일 땅에서, 선원 창녀 술꾼 거지가 대부분인 병원에서 피로와 외로움을 씻어 준 유일한 도구가 그림이었다.

독감으로 결근하는 바람에, 병문안 왔던 간호장이 그의 방에 가득 쌓인 그림들을 보게 되었고, ‘여가를 위한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병원에서 첫 전시회를 열어 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함부르크 국립예술대학의 학생이 되고 교수자리에까지 오르게 됐다.

유럽 화단에서 그는 ‘동양의 명상과 독일의 표현주의가 만나는 가교’ ‘그림의 시인’이란 평을 듣고 있다. 백남준은 그를 두고 “독일에 훌륭한 작가가 있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고 다녔다. 1997년 함부르크 알토나 성 요한니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독일과 유럽의 쟁쟁한 작가들과 경쟁 끝에 그녀가 따 낸 유명한 공공설치 작품이다. 국내에도 서울 LG아트센터 지하도 연결부분 벽화, 강원도 원주시 문막 오크밸리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공공작품들이 있다.

○ “그림은 인생의 숙제푸는 도구”

‘두 사람’(2002년), 138×166㎝

“인생의 숙제를 푸는 데 그림은 나에게 도구였으며 길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를 태우고, 녹이고, 잊고, 들여다보았다. 살아남는다고 전쟁터 병사처럼 싸울 필요는 없다. 오히려 풀밭에서 뛰노는 어린 아이 같아야 한다.”

오랜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난 뒤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러서야 공기처럼 가벼움을 느끼며 땅과 하늘을 떠도는 부유감을 느끼고 있다는 그녀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지나온 삶을 그림과 글에 담은 ‘내 짐은 내 날개다’(샨티 간)란 수필집도 냈다. 그림만큼이나 글도 담백함 그 자체다. 전시는 16일까지. 02-734-6111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