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 나무에 대한 사랑을 환경공학 기술로 승화시킨 이 교수는 오늘도 푸른 대한민국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선생님, 수소랑 산소랑 결합시키면 물이 얼마든지 만들어지잖아요. 그런데 왜 가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는거죠?”
과학 수업 시간 짧은 단발머리 중학생 소녀의 다소 엉뚱한 질문이다. 30년 후 이 소녀는 또 한번 기발한 생각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바로 중금속을 ‘먹어 치우는’ 식물을 개발해 ‘식물을 이용한 환경정화(Phytoremediation)’를 성공시킨 것. 그 주인공은 포항공대 생명과학과의 이영숙 교수(49)다.
이 교수는 지난해 세계적 생명공학지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Nature Biotechnology)’ 8월호에서 카드뮴과 납 등 중금속에 저항성을 지닌 유전자(YCF1)에 대한 흥미로운 논문을 게재했다. 실험용 식물인 애기장대에 이 유전자를 삽입하자 중금속을 꿀꺽 먹어치운 채 잘 견뎌내는 개체로 둔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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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유전자를 몸집이 큰 식물에 삽입하면 환경오염이 심한 지역에서 독성을 쑥쑥 잘 빨아들이지 않을까. 더욱이 그 지역에 푸른 나무가 가득할 테니 우리에게 일거양득의 효과를 주는 셈이다. 실제로 이 교수는 현재 가로수로 많이 쓰이는 포플러에 중금속 저항 유전자를 삽입해 정화능력을 테스트하고 있다.
이 교수의 식물 사랑과 과학에 대한 호기심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온종일 산과 들을 돌아다녔고, 집 정원에서 한없이 꽃을 들여다봤어요. 씨앗을 깨뜨려보고, 해마다 예쁜 봉숭아물도 직접 들였죠.”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환등기를 직접 만들어 사업을 하시겠다며 렌즈를 비롯해 온갖 장비들로 집을 가득 채운 일이 기억난다. 비록 아버지의 사업은 망했지만, 당시 이 교수는 렌즈를 가지고 놀면서 과학기술에 대해 친근감을 쌓아갔다.
하지만 정작 과학자의 길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의외로 도스토예프스키 때문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글짓기를 잘해 대회에 나가 상을 많이 탔던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은 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똑같은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데도 양쪽 모두 너무 설득력이 있었다. 도저히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판단할 수 없던 상황. 그래서 누구든지 똑같은 과정으로 똑같은 실험을 하면 똑같은 결과가 나와서 아무리 궤변을 늘어놓아도 부정할 수 없는 분야, 즉 과학에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이런 이 교수를 지금까지 이끌어준 데는 학문적 스승이자 인생의 스승인 루스 새터 교수(1989년 작고)가 있었다. 서울대 식물학과 석사과정 시절 식물 세포들이 물, 이온, 당, 단백질 등을 어떻게 운반하는지에 대한 수송 문제에 관심이 많았지만 국내에서는 별로 연구되지 않은 분야였다. 그런데 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미국 코네티컷대 새터 교수가 세미나 발표 차 서울대를 방문했다. 이 인연을 계기로 이 교수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새터 교수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이 교수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선생님은 제게 인생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못된 짓을 하더라도 비판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잘 될 것을 믿어주고 격려해주듯이 잘못한 일이 있어도 한 번 지적한 후에는 두 번 다시 언급하는 법이 없었죠.”
이 교수는 스승의 이런 뜻을 이어가기 위해 스승의 이름을 따 ‘새터 장학금’을 만들었다. 지난해 12월 제3회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자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받은 상금 1000만원뿐 아니라 자비를 들여 2013년까지 10년 동안 매년 1000만원씩 박사과정 여학생을 위해 장학금을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새터 교수의 남편인 로버트 새터 코네티컷주 고등법원 판사(83)도 이런 이 교수의 뜻을 반기며 매년 아내의 생일에 맞춰 1000달러씩 장학금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그간 세간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던 식물학 영역에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제시한 이 교수. 조만간 환경정화용 식물의 안전성 테스트를 거쳐 상용화시키려는 ‘푸른’ 꿈을 가지고 있다. 식물이 만드는 환경공화국, 대한민국의 미래를 기대해본다.
이현경 동아사이언스기자 uneasy75@donga.com
▼이명숙 교수는▼
1955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손위 오빠가 동물을 좋아해서 병아리, 오리, 토끼 등 각종 동물을 집에서 키워 동물들과 친해졌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집안 분위기 덕분에 공부에 쫓기지 않아 형제들과 산과 들로 놀러 다니면서 자연스레 풀과 나무와 친해졌다. 한때 문학가의 꿈도 가졌지만 과학이 더 적성에 맞다고 판단해 1974년 서울대 식물학과에 입학했다. 서울대 석사과정 시절 만난 미국 코네티컷대 루스 새터 교수에게 지도를 받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 후 198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에서 2년 동안 박사후 과정을 거쳤고, 1990년 포항공대 교수로 부임했다. ‘금강경’을 읽으며 열린 마음을 배우고, DVD에 포함된 영화제작 과정을 보면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좋은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힌트도 얻는다.
▼청소년에게 한마디▼
여유를 가져라. 스스로 사물을 관찰하고 의문나는 점이 있을 때는 여러 가지 답을 생각해보라. 이런 여유를 가진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꿈에 다가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