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올해 초 중국이 10년간 공들인 러시아 원유 수송 파이프라인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중국 다칭(大慶)과 연결하는 것이 확실시되던 시베리아 앙가르스크 유전의 파이프라인 종착지를 일본과 가까운 나홋카로 하기로 러시아와 합의한 것이다.
이를 위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이례적으로 러시아를 두 차례나 방문했으며 투자비로 150억달러를 제안했다.
중국과 일본이 석유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시베리아 파이프라인 경쟁은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중국은 최고 권력자와 군부까지 나서는가 하면 일본은 자본력을 앞세워 유전 사냥을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두 나라의 경쟁이 유가 상승과 석유 수급 불안 등으로 이어져 아직까지 방어적 에너지정책에 머물고 있는 한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미 중동산 원유의 아시아 판매 가격은 미국이나 유럽 판매가보다 높다. 또 중일간 유전 확보전은 영토분쟁으로 이어져 석유 수송로 확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데다 동북아 정세의 불안요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두 나라가 동북아 일대 유전을 독식하면서 한국은 원유 자급률을 높일 기회마저 잃고 있다.
▽절박한 중국=중국은 2002년 아제르바이잔의 유전 2개를 5200만달러에 샀다. 이는 차점 가격보다 40%나 높았다. 또 러시아 석유회사 매입에 경쟁자보다 절반가량 높은 값을써내기도 했다.
또 중동과 아프리카 산유국에는 군대를 파견하거나 무기를 원조하는 등 군부까지 동원하고 있다.
중국이 해외 유전 매입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고도성장을 뒷받침해야 하는 국내 상황과 미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이라는 대외 정책 때문.
한때 쿠웨이트 수준의 원유 생산량을 자랑했던 중국은 1993년 순수입국으로 전락했다. 이에 따라 전체 원유 수입량의 절반을 자체 해외 유전 개발을 통해 조달키로 했다.
그러나 주요 유전은 서방 자본들이 점령하고 있고 최대 수입처인 중동은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다. 잠재적 대립관계에 있는 미국의 패권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급증하는 석유 수요를 충당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제임스 베이커 전 미국 국무장관은 “중국의 정치·경제적 최대 제약 요건은 석유 수입 증가와 중동 의존도 상승”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비(非)중동 진출 확대와 중동 내 독자적 공급처 확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야 했다.
이를 위해 국가위원회 산하 국가경제무역위원회 직속으로 총자산 1000억달러 규모의 국영 석유회사 4개를 만들어 세계의 유전을 대상으로 지분 확보에 나섰다. 또 아프리카 등 새 유전이 개발되는 곳에는 예외 없이 군사력을 지원하는 등 군부까지 동원하고 있다.
중동의 공급처 확보와 관련해 중국은 2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미국을 제치고 가스전 개발권을 따냈다.
한국석유공사 구자권 해외조사팀장은 “사우디가 석유사업을 국유화한 뒤 외국에 개방한 첫 광구를 중국이 땄다는 점에서 미중간 역학관계의 변화도 점쳐지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견제=중국의 부상은 일본을 자극했다.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이 높아 중국과 경합하게 됐고,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유전에 대한 선점 경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은 1880년대부터 유전 탐사를 시작했고 석유 확보를 위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석유 봉쇄로 패한 경험이 있다. 에너지 자원에 대한 정치·경제적 이해가 주변국과 다르다.
일본은 이미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2월 초대형 유전인 이란 아자데간 유전(매장량 250억배럴) 개발권을 따내는 등 중국 견제에 돌입했다.
지난해에는 아프리카 공략을 위해 10억달러를 무상 원조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에너지경제연구원 김진우 동북아센터장은 “중국과 일본은 국가 안보 차원에서 배타적인 석유 확보에 나서고 있는 만큼 한국이 주장하는 동북아 에너지 ‘협력’의 실현 가능성은 매우 낮다”며 “그런데도 한국은 아직까지 에너지 관련 정부 협의기구조차 변변치 않다”고 지적했다.
▽분쟁의 불씨=중국과 일본의 유전 확보전은 영토 분쟁의 가능성도 갖고 있다.
난사제도와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중일간 갈등의 내막은 해당 지역의 유전 탐사권을 둘러싼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특히 이 지역은 동북아의 원유 수입 수송로여서 분쟁이 일어나면 한국과 일본은 직접적인 피해를 보게 된다.
삼성경제연구원 김현진 수석연구원은 “중일 갈등이 정치적 위기로 번지면 중국과 동일한 수송로를 갖고 있는 한국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9·11테러’ 이후 미국 대외정책이 대테러전에 초점이 맞춰진 것도 동북아 에너지 안보를 흔들 수 있는 요인이다.
미국이 수단 등을 테러지원국으로 지목하고 있어 이들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고 석유 개발권을 확보해 놓고 있는 중국과의 미묘한 갈등이 예상된다.
미국 라이스대 베이커연구소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무기 수출을 연계한 중국의 석유 확보 전략이 역설적으로 중국과 서방의 에너지 안정을 해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폴 울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은 ‘국제 경제와 미국의 이익’이라는 책에서 “경제학자들은 중국이 석유를 정치적 무기로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발발했는지를 기억하라”고 말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이병기기자 eye@donga.com
▼수입시장 다변화 절실▼
동북아의 에너지 질서 변화는 이른바 ‘아시안 프리미엄’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아시안 프리미엄은 중동산 석유에 대한 아시아 국가와 미국·유럽 국가들의 구매 가격 차이.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아랍 경질유의 아시안 프리미엄(유럽 국가와만 비교)은 1993년 이후 평균 0.82달러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 국가들보다 배럴당 0.82달러를 더 줘야 석유를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 에너지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아시안 프리미엄으로 인해 일본이 추가로 지불한 금액(99년 기준)은 30억달러, 한국은 15억달러로 추산된다.
아시안 프리미엄은 90년대 들어 정착되기 시작했다. 원인은 무엇보다 석유 수급 불균형. 아시아의 석유 수요는 세계 수요의 25%에 이르지만 매장량은 4%, 생산량은 11%에 불과해 부족분을 역외 수입에 의존한다.
특히 중동 의존 비중이 78%(2003년 기준)에 달해 웃돈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은 중국의 원유 수요 증가 등으로 인해 갈수록 심화되는 추세다.
실제 아시안 프리미엄은 93년 1.06달러에서 97년 외환위기로 0.59달러까지 떨어졌지만 2002년 0.96달러, 2003년 1.36달러로 뛰었다.
여기에 국제 석유시장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산유국과 소비국의 전략적 유대관계가 아시안 프리미엄에 반영돼 있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이범준 과장은 “단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등 일부 중동 산유국들은 미국의 최대 석유 공급원이 됨으로써 안보를 보장받으려 하고 있다”며 “이를 위해 미국 수출 가격은 다소 낮게 책정하는 대신 아시아 국가들에서 차액을 보전한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아시아시장용 원유 가격의 기준인 두바이유 가격이 다른 유종(油種)보다 불안정하고 비합리적이며 아시아에 제대로 된 석유 유통시장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아시안 프리미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석유 수입시장을 다원화하고 독자적인 동북아 석유거래시장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동북아 국가간 에너지 확보 경쟁으로 협력체제 구축이 어려운 데다 한국의 수입처 다변화도 요원한 실정이어서 가격차별을 피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김용기기자 ykim@donga.com
고기정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