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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마당]지상현/디자인은 기획이다

입력 | 2004-05-09 18:37:00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을 둘러싼 논란 때문인지, 최근 간판 거리시설물 등 도시의 시각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이 점에서 최근 동아일보가 다룬 ‘공공디자인’ 시리즈는 디자인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풀어준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디자인이라는 것이 배가 부른 후에나 필요한 여기(餘技)가 아니라 배가 부르기 위해 필요한 경영의 핵심 요소이자 관(官)의 경우에는 필수적인 대민(對民) 서비스라는 점을 일깨워줬다. 아울러 좋은 디자인은 제대로 된 기획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도 확인케 해줬다.

차제에 우리 디자인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몇 가지를 짚어보고 싶다. 무엇보다 디자인은 디자이너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디자인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 수준이 높아져야 디자인이 좋아진다. 또 결재권자들이 디자인을 알아야 세련된 디자인이 일반의 눈에 전달될 수 있다.

디자인을 필수적 교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선진국에서는 디자인 없는 기업 경영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우리의 기업과 대학의 상황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디자인이 대학의 교양과목이나 기업체 연수프로그램에 들어가 있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디자이너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다. 흔히 디자이너들은 기획 마케팅 분야 사람들이 디자인을 너무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평하지만, 그 분야의 사람들은 거꾸로 디자이너들과 대화하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디자이너들이 기획이 무엇인지, 마케팅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디자이너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과 함께 스스로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워야 한다. 비언어적(시각적) 성격의 일을 한다고 해서 언어적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감각만을 고집하지 않고 기획을 중시하는 태도다. 기획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언어로 사고하는 과정이다. 언어로 얘기할 때 다른 사람들도 쉽게 이해하고 설득될 수 있다.

최근 중국에 다녀온 한 디자인 전공 교수는 “중국의 발전 추세가 무섭다. 조만간 모든 산업 분야에서 우리를 추월할 것 같다. 겨우 디자인 분야 정도가 중국을 앞서갈 가능성이 있을까”라고 말했다. 우리의 미래에서 디자인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시사해 주는 말이다.

디자인은 문화적 배경이 담긴 그릇과 같다. 열심히 하면 최소한 우리 문화 역량만큼의 몫은 확보할 수 있고, 더 노력하면 이탈리아처럼 강국이 될 수도 있다. 디자인이야말로 우리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야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디자인 분야의 세계적 흐름 가운데 하나가 디자인과 과학, 공학의 결합이다. 기획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도 과학적 방법과 절차를 중시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한국의 디자인이 향후에도 중국을 앞설 수 있느냐의 여부는 디자인에 과학적 지식과 방법을 얼마나 잘 도입하는가에 달려 있다. 아직 감각과 실기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많은 우리 디자인계를 생각하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상현 한성대 교수·시각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