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후일기에는 각 승지들이 담당부서의 업무 내용을 토대로 왕에게 보고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승지들은 또 왕의 처분이 있으면 보고서의 공백에 받아 적었다. -사진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시대 사관은 군주를 중심으로 조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관료였다. 예문관(藝文館)에 소속된 사관들이 매일 2명씩 교대로 왕의 동정을 비롯해 정사에 관한 일을 기록했다. 사관의 기록은 왕이 사망한 뒤 실록 편찬의 기초자료가 된다고 해서 ‘사초(史草)’라 불렸다. 사초는 사관 외에는 누구도 열람할 수 없었다. 거기에는 정사에 관한 객관적 기록뿐 아니라 사관의 평가도 포함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황천과 사필(史筆)뿐”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조선 중기부터 왕명을 출납하던 승정원(承政院)의 주서(注書·서기)도 사관에 포함됐고, 그들이 임금 옆에서 매일 기록한 ‘당후일기(堂後日記)’도 사초로 활용됐다. 특히 이것은 ‘승정원일기’ 편찬의 주된 자료가 됐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 유씨 집안인 화경당(和敬堂·일명 北村宅)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고문서 자료 가운데는 당후일기 한 묶음이 포함돼 있다. 정조 때 주서로 재직했던 유이좌(柳台佐·1763∼1837)가 1799년 5월17일(음력)의 정사를 기록한 당후일기 원본이다.
표지에는 날짜, 날씨, 왕의 거처가 적혀 있다. 비가 내린 이날 왕은 창덕궁(昌德宮)에 있었다. 내지에는 왕이 승지들에게 지시한 사항을 별도의 용지에 적었고, 이어 각 승지들이 왕에게 보고한 내용을 기록했다. 왕의 처분이 있으면 보고서 공백에 받아 적었다.
일부 수령이 각종 핑계로 부임을 늦추고 있어 이조에서 이들을 모두 교체할 것을 건의하자, 왕은 “민생이 시급한 실정에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 병든 성천부사는 교체하되 나머지 수령들은 자리를 서로 바꾸는 방안을 찾아 구두로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이조가 구두로 성천부사 대상자와 수령들의 상호 교체안을 도승지를 통해 보고했고 왕이 낙점해 시행했다. 이 내용은 ‘승정원일기’에도 그대로 수록됐다.
실록의 사초는 편찬 후 한강 물에 씻어(洗草·세초) 없애버리지만 당후일기는 정사의 참고를 위해 보관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현재는 당후일기만 전할 뿐이다.
설석규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