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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9년 팔레비 궐석재판서 死刑

입력 | 2004-05-11 18:49:00


“미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었다!”(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미국이 ‘악의 축’으로 지목했던 이라크에서 정작 ‘악마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미군(美軍). 인류의 전쟁에서 그 누가 이처럼 백일하에 ‘인류에 대한 범죄’에 노출됐던가.

이슬람권에서 반미주의(反美主義)의 뿌리는 1953년 미국이 이란에 ‘수출한’ 군사쿠데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란은 1951년 중동에서 최초로 석유자원의 자주권을 주장했다.

총리로 선출된 모하마드 모사데크는 석유국유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것은 자원민족주의의 선포였다.

그러나 이 민주정부는 이태 뒤 쿠데타에 의해 날개가 꺾이고 만다. 쿠데타는 값싼 석유 위에 제국을 건설했던 영국(처칠)과, 그 사주를 받은 미국(아이젠하워)의 합작이었다.

외세에 힘입어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선 팔레비왕조는 석유 수출과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강력한 산업화 정책을 펴나갔으니 그게 바로 ‘백색(白色)혁명’이다.

그러나 이 ‘페르시아의 왕자’는 혁명을 추진할 만한 스탈린의 잔인함도, 앙칼짐도 없었다. CIA는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팔레비는) 천성이 우유부단하고, 애매모호한 의심과 두려움에 싸인 인물이다.”

팔레비는 일생에 두 번 벅찬 상대를 만났다. 그 첫 번째 상대인 모사데크는 미 CIA가 몰아냈으나 그 두 번째 상대인 호메이니에게는 패퇴했다. 쫓겨 가는 팔레비는 실패한 독재자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탄식했다. “국민의 특권은 배은망덕이다.”

이란의 현대사는 호메이니가 프랑스 파리에서 이란으로 돌아온 1979년 2월 1일부터 팔레비 왕정의 붕괴를 공식 선언한 11일까지는 ‘여명(黎明)의 10일’로 기록한다.

그해 5월 이슬람혁명정부는 궐석재판에서 팔레비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팔레비는 이집트 모로코 멕시코 등을 전전해야 했다. 그는 얼마 뒤 미국으로 건너가는데 그것은 테헤란의 미국대사관이 점거당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란의 부메랑’은 지금 이라크에서 미국의 목을 조르고 있는가.

일찍이 마하트마 간디는 말했다. “아무리 나쁜 정부도 외국의 그 어떤 좋은 정부보다 낫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