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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천광암/부유세의 덫

입력 | 2004-05-11 18:49:00


‘부유세 식당’ 주인 A씨는 고루 나눠먹는 세상을 바란다. A씨는 가난한 손님에게 라면을 공짜로 준다. 대신 부자 손님이 암소갈비를 주문하면 값은 다 받되, 싼 불고기를 내놓아 수지를 맞춘다. 식당이 이곳뿐이면 사업도 유지되고, 인심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경쟁 식당이 한 곳만 옆에 있어도 부자 손님들은 ‘부유세 식당’에 발길을 끊을 것이다. 돈 낸 만큼 암소갈비를 주는 식당이 있는데 억지춘향으로 불고기 먹으라는 식당에 올 까닭이 없다. 반면 공짜 손님은 갈수록 늘 것이다. 결국 이 식당은 수지가 안 맞아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암소갈비 뜯는 사람 불고기 먹게 하고, 굶는 사람 라면 먹게 하는 부유세’(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의 함정이 여기에 있다.

세금제도가 바뀌면 사람들의 행동이 변하고 국민경제에 큰 파장이 나타난다. 따라서 긍정적인 영향, 부정적인 영향을 사전에 세심하게 따져봐야 한다. 부자의 동정심이나 애국심만 믿을 게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마음속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민노당 안대로 0.2∼5.0%의 누진세율로 부유세를 매긴다면 부동산 60억원, 예금 50억원을 가진 B씨는 어떻게 대처할까. 부동산은 계속 보유하고 세금도 낸다고 치자. B씨가 50억원을 금리 4%인 1년짜리 정기예금에 넣었을 때 받는 이자는 2억원이다. 부유세 2억5000만원과 이자소득세 5000만원을 내고 나면 B씨가 나중에 손에 쥐는 원리금은 49억원. 원금에서 1억원이 날아가는 셈이다. 원금도 못 건지는 은행에 돈을 맡길 바보는 없다. B씨는 차라리 이 돈을 현금으로 숨겨두거나 부유세가 없는 해외에 투자하려 할 것이다.

실제로 부유세 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들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가 자본 유출이다. 스웨덴에서는 2000년에 신고 없이 해외로 빠져나간 자금이 제대로 신고됐더라면 부유세 수입이 87% 늘었을 것으로 추산될 정도다. 집집마다 부동산 예금 증권 자동차 사치품 골동품이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고 객관적인 가치를 평가하는 데 따르는 행정비용도 만만찮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 아일랜드는 득보다 실이 많다고 봐서 부유세를 없앴다.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등에서도 폐지나 완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더구나 부유세는 돈이 많이 걷히는 세금도 아니다. 우리나라 총 세수(稅收)의 10%에 해당하는 11조원을 거둘 수 있다는 민노당의 주장은 현실성이 거의 없다. 현재 부유세가 있는 유럽 8개국 중 스웨덴 등 5개국의 부유세 비중은 1%도 안 된다. 우리보다 과세기반이 잘 갖춰져 있고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데도 그렇다.

‘부유세 식당’ 주인 A씨가 망하지 않으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있다. 먼저 질 좋은 암소갈비와 친절한 서비스로 부자 손님이 많이 오게 한 뒤 여기서 번 돈으로 무료 급식을 하면 된다. 최근 세계 각국이 앞 다퉈 세율을 낮추고 인센티브를 주면서 자본을 유치하는 이치와 같다.

조세형평성은 현행 소득세와 상속·증여세(최고세율 50%)에서 새나가는 세금만 잘 관리해도 충분히 제고된다. 빈부갈등 격화, 자본 유출, 지하경제 확산 등 부작용 많은 부유세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천광암 논설위원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