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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기자 英종군기자 연수기]실제상황 같은 피랍 경험

입력 | 2004-05-11 18:58:00

교육 이틀째인 4월 27일 오후 검은 복면을 한 무장괴한(교관)들이 연수에 참가한 한국 기자들을 차에서 끌어내 복면을 씌우고 구타하며 소지품을 뺏고 있다. 인질로 잡힐 경우 말을 하지 말고 일단 지시에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사진제공 한국언론재단


“입 다물어. 개자식들…. 차에서 기어나와!”

4월 27일 오후 3시. 영국 런던 시내에서 1시간 떨어진 웨스트 서섹스 인근의 헥필드 플레이스를 지나는 시골길. 분쟁지역 취재연수를 받기 위해 승합차로 이동 중이던 한국 기자 9명은 갑자기 들이닥친 무장괴한들에게 마구 끌려나갔다. 일과표에도 없던 상황. ‘훈련이겠거니…’ 하며 안이하게 생각했던 기자들은 괴한들의 무차별 주먹질과 발길질에 아연 긴장했다. 머리에 두건을 씌운 채 총부리를 들이댈 때는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다.

상황이 벌어지기 직전 배운 ‘생존요령’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숨이 가빠지고 심장은 요동쳤다. 교관들은 무장세력과 맞닥뜨리면 “말하지 말고 지시에 따를 것, 카메라는 총으로 오인될 수 있으니 휘두르지 말 것, 버클이나 시계도 햇빛에 반사될 경우 총구의 섬광으로 오인될 수 있다”며 조심할 것을 강조했다. 무릎을 꿇린 채 고초당하기를 10분. 그러나 어둠 속의 공포는 마치 1시간 이상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이는 한국언론재단이 국내 언론사상 처음 마련한 분쟁지역 취재에 대비한 해외연수 이틀째 벌어진 모의납치 상황. 연수는 세계적 훈련기관 7곳 가운데 하나인 ‘센추리언 리스크 어세스먼트 서비스(CRAS·Centurion Risk Assessment Services)’의 헥필드 훈련장에서 진행됐다. 교관들은 대부분 영국과 프랑스 특수부대 전문가들.

3일째 실습은 무장세력의 검문소 통과하기. 기자들은 4인 1조로 나눠 미리 입을 맞췄다. “반군 지도자를 인터뷰하러 왔다”는 말은 금기사항. 스파이로 오인받을 수 있다. 양주와 담배를 ‘뇌물’로 주며 구경 왔다고 둘러대는 쪽으로 각본을 짰다. 하지만 무장세력이 한명씩 불러 격리심문을 하는 바람에 ‘거짓말’은 탄로났다. “무장세력과 대화할 때는 항상 말을 천천히, 느리게 해야 한다. 길게 (설교하듯) 말하지 말고 짧게 이야기하라”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교관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있고 분명한 태도를 취하라고 강조했다.

26일부터 5일간 계속된 연수기간에 수류탄이나 박격포탄이 터졌을 때 폭발장소 반대방향으로 재빨리 엎드린 뒤 귀를 손으로 막고 입은 벌리는 ‘반응훈련’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온갖 폭발물의 종류, 동료의 팔다리가 잘려나갔을 경우 지혈법, 심각한 중상을 입었을 때의 생존법도 교육받았다.

교관들은 “위험하지 않은 분쟁지역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기자들이 위험의 중심에 뛰어들지 않는다면 참상과 잔혹함을 누가 알릴 수 있을까. 1995년 설립된 CRAS에서 지금까지 1만4000여명의 기자들이 연수를 받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90년 이후 세계적으로 최소 1192명의 언론인이 취재 중 사망했다. 지난해 3월 이라크전쟁 발발 이후 6개월간 최소 13명의 언론인이 숨지기도 했다.

교육 마지막날 CRAS의 데이브 톰슨(48·폭탄전문가) 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기자는 뉴스를 전하는 사람이지 스스로 뉴스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자가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다면 진실을 보도할 사람은 누구인가….”

헥필드=이호갑기자 gd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