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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영혼 보듬어온 ‘구도자 詩人’

입력 | 2004-05-11 19:04:00

2002년도 경북 왜관서 생활할 때의 구상 선생의 모습.-동아일보 자료사진


‘시인이자 구도자’, ‘인격과 시가 일치한 우리 시대의 어른’.

11일 타계한 구상 선생의 삶을 기리는 문학계와 종교계 지인들의 목소리다.

1919년 함경남도 문천에서 태어난 고인의 본명은 구상준(具常浚), 가톨릭 세례명은 요한이다. 구 선생은 사제가 되기 위해 원산의 독일계 성 베네딕트 수도원 신학교에 진학했지만 포기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대 종교학과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구 선생은 46년 동인지 ‘응향(凝香)’에 ‘밤’ 등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이 동인지 표지를 화가 이중섭이 그렸다. 그러나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응향’에 대해 “반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하자 그는 월남했다. 이후 1948∼50년 6·25전쟁 종군작가단 부단장을 지냈으며 국방부 기관지인 승리일보를 비롯해 영남일보 등에서 일했다.

전후 이승만 정권에 대해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그는 52년 승리일보가 폐간되자 의사였던 부인 서정옥씨(93년 작고)가 의원을 차린 경북 왜관으로 삶터를 옮겼다. 이 무렵 영남일보 주필을 맡아 대구를 오가며 오상순, 마해송, 걸레스님 중광과 교분을 나눴고 이중섭은 왜관의 그의 집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59년 평론집 때문에 필화사건에 휘말려 8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4·19혁명 전 풀려났다. 평소 사석에서 “박첨지”라 부르며 교분을 나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에게 대학 총장직 등을 제의했지만 그는 ‘시인의 길’만 고집했다. 시 작업 틈틈이 서울대, 중앙대, 미국 하와이대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11일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마련된 구상 선생의 빈소를 찾아 묵념하고 있다. -권주훈기자

구 선생은 지난해 10월 사재 2억원을 장애인 문학지 ‘솟대문학’ 발간기금으로 내놓았다. 한 지인은 “선생은 갖고 있던 이중섭의 그림 등 재산 대부분을 어려운 이들을 위해 내놓았지만 이런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고 전했다. 유족들은 구 선생이 폐질환으로 지난해 9월부터 입원 치료를 받아 왔으며 기관지 절개수술을 받았던 탓에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못했다고 전했다.

구 선생의 대표작으로는 56년 발표한 연작시 ‘초토의 시’를 들 수 있다. 전쟁의 고통을 초월해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견고한 시어로 표현했다. 이 밖에 ‘구상시집’(51년) ‘말씀의 실상’(80년) ‘유치찬란’(89년) ‘인류의 맹점에서’(98년) 등 10여권의 시집, ‘영원 속의 오늘’(76년) ‘삶의 보람과 기쁨’(86년) 등 10여권의 수상집과 사회비평집을 남겼다.

그는 사회 불의를 고발하면서도 자기 참회로 귀결되는 시 세계를 펼쳐 보였다. 견고한 기독교 신앙 위에 우리의 건국신화와 전통문화를 아울렀으며 나아가 선불교적 명상과 노장 사상까지 포괄하는 시 세계를 구축했다.

빈소를 찾은 김수환 추기경은 고인에 대해 “그는 좁은 의미의 가톨릭이 아니라 종파를 넘어서 온 세계를 아우르는 의미로서의 가톨릭 시인이었다. 모든 것을 향해 열려 있었고, 항상 마음을 비우는 진실의 사람이었다”고 추모했다. 고은 시인은 “구 선생은 현대사의 격랑을 살아 온 시인”이라며 “그의 시는 거의 직언과도 같았다. 수사가 없고 솔직했다”고 말했다.

그는 금성화랑무공훈장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이날 빈소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조화를 보냈으며 박삼중 스님과 문덕수 김남조 김광림 구중서 성찬경 김종길 김종해 신세훈 신달자 김이연 류자효씨 등 후배 문인들이 찾아왔다. 13일 치러질 장례미사에서는 김남조 시인이 조시(弔詩)를, 성찬경 시인이 조사를 읽는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