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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인]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 보수일까 진보일까”

입력 | 2004-05-13 16:14:00

동아일보 그래픽 자료사진


‘당신은 보수입니까, 아니면 진보입니까.’

4·15총선 이후 진보, 보수, 중도 등에 대한 이념 논쟁이 뜨겁다. 정당에 대한 정체성 논쟁은 물론, 국민 성향을 알아보려는 각종 여론 조사도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국어대사전에는 ‘보수’는 ‘오랜 관습이나 제도 등을 소중히 여겨 그대로 지킴’, ‘진보적’은 ‘사회 개혁과 진보를 꾀하는 성질이 있음’이라고 돼 있다. 정치권에서는 대북정책이나 외교관계, 재벌정책 등에 따라 보수, 진보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을 보수 또는 진보라고 판단하는 것일까. 사전적 의미나 정치적 편 가르기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일까.

위크엔드팀은 다음커뮤니케이션, SBS ‘야심만만’ 팀의 도움을 얻어 20, 30대 네티즌 1200여명에게 ‘어느 때 당신은 진보(보수)라고 느끼는가’에 대해 물어봤다.

가급적 다양하고도 주관적인 응답을 얻기 위해 설문은 두 단계로 나눠 실시했다.

우선 서울 강남역 주변의 남녀 직장인들에게 기자가 직접 물었다. 보수와 진보를 판단하는 상황에 대해 300여 가지 응답이 나왔지만 유형별로 분류해 보니 각각 15가지 정도로 압축됐다. 이를 포털사이트 ‘다음’에 올려 네티즌들이 공감하는 내용을 각각 3개까지 선택하도록 했다.

○ 세월 따라 성향도 변화

‘자신이 보수적이라고 느껴질 때’에 대한 질문에서 1위는 ‘사회적 권위에 약해지면서 순종적이 되려는 나를 볼 때’(36.5%)로 나타났다. 평소에 주장하던 생각이나 성향이 현실 앞에서 달라지는 순간은 누구나 겪는 일. ‘미래 전망보다 현재 평판으로 회사를 선택했을 때’, ‘후배 때는 거부했는데 선배가 된 후 대접받기 원할 때’ 등의 대답도 이 유형.

세월의 흐름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또 하나의 기준일까. ‘젊은이들의 행동이 철없이 느껴질 때’(34.2%)와 ‘나이 들어 어른들 말씀이 맞구나 생각할 때’(33.3%)가 각각 2, 3위를 차지했다. ‘맹목적인 학생들의 반미 투쟁을 볼 때’, ‘젊을 때 공부하라는 말이 뼈에 와 닿을 때’, ‘내가 했던 잘못을 후배들이 반복하는 걸 보고 안타까울 때’ 등이 두 유형에 포함됐다.

다음은 ‘인맥과 연줄, 학연이 그래도 중요하다고 느껴질 때’(4위·25.9%)와 ‘미군은 그래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5위·22.8%). ‘미군을 보면 괜히 듬직해 보일 때, 백인을 보면 괜히 길 안내해 주고 싶어질 때’ 자신이 보수적이라고 느낀다는 사람도 있었다.

성에 관해서는 전통적 성 역할을 지키려 하거나 호주제 폐지 등에 반대하는 식의 답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실제로는 ‘내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많이 꼽았다. ‘담배 피우는 여자가 싫어질 때’, ‘귀골이 하는 남자를 볼 때’ 등 ‘여자가… 또는 남자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6위(19.7%).

이 밖에 ‘젊은이 문화나 행동이 이해가 안 될 때’(17.9%), ‘나는 따랐던 행동을 후배들이 거부하는 것을 볼 때’(16.4%), ‘사회 질서나 전통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될 때’(15.9%), ‘시위나 집회로 길 막혀서 짜증이 날 때’(15.5%) 순이었다.

○ 결혼 꼭 해야하나요?

때가 때인지,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되는 상황 1위는 ‘탄핵 당시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을 때’(36.2%)가 가장 많았다.

이대 심리학과 양륜 교수는 “평소에는 자신이 어느 쪽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며 “선택을 하고 그 결과로 자신의 성향을 분류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해석했다.

‘당연히 통용되는 질서에 거부감이 들 때’(34.3%)가 그 다음. 이 유형에는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 ‘호주제 폐지나 동성 간 결혼을 찬성’ 등을 통해 자신의 진보성을 느낀다는 응답자도 많았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생각도 중요한 기준. 3위는 ‘외국인 노동자도 한국인과 똑같이 대우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33.5%)였다. 하지만 정책보다는 구타 금지, 동일 임금 등 인도주의적인 고려가 주를 이뤘다.

4위에는 ‘전통적인 어머니 역할을 하고 싶지 않을 때’, ‘여자도 가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등 ‘성 역할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27.4%)가 올랐다. 이 유형에서는 ‘아내가 돈 벌어 와서 좋았을 때’라고 응답한 사람도 있었다.

5위와 6위는 ‘학연, 지연에 대한 거부감’(23.5%)과 ‘선배가 시키는데 감히…란 말에 반항심이 생길 때’(21.7%). ‘예전부터 그랬다며 강요할 때’, ‘위계 서열 문화가 싫을 때’ 등 현실에 대한 저항감도 드러났다.

이 밖에 ‘보수로 상징되는 집단이나 사람을 보면 기분이 나쁠 때’(7위·19.4%), ‘외로워도 대세와는 무관하게 내 길을 갈 때’(8위·17.8%)가 차지했다.

또 ‘미국 비자 받으려 줄서 있는 사람들이 못 마땅할 때’(17.1%)가 9위에 올라 최근의 반미 감정을 반영했으며, ‘현재의 룰이 나와 안 맞는다고 생각될 때’(15.6%)도 10위에 들었다.

○ 내 마음속의 진보-보수

이번 조사과정에서 응답자들에게서 받은 대표적인 질문은 “도대체 진보는 뭐고 보수는 무엇이냐”, “지금 왜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 보수냐, 진보냐 하는 기준은 물론, 자신의 정체성도 명확지 않았다. 또 설문 결과에서 나타나듯 정치, 사회, 심리적으로 전혀 진보, 보수를 가를 수 없는 사안으로 자신이 보수 또는 진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응답자 중의 한 명은 기자에게 ‘왜 우리가 이념 논쟁에 휩싸여야 하느냐.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러는 것이냐’며 장문의 글을 보내 설문 취지를 설명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보수 쪽의 사례는 대체적으로 일, 가정, 학교 등 현실 속 상황이 많았던 반면 진보 쪽은 관념이나 이상적인 대답이 많았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만 속한다거나, 한쪽의 사례만을 쓴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양 교수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진보성과 보수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며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선택을 한 결과를 놓고 이제는 모두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이념논쟁을 통해 상대를 적으로 몰아가기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 있는 위치를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