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과천시 문원동에 사는 오철승씨(37·사업)는 요즘 현우(초등학교 2년), 현민(유치원) 두 아들을 대하며 바뀐 모습에 살짝살짝 놀란다.
아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내던 모습을 통 보이지 않는다. 또 애들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차분히 아이들의 잘못을 바로잡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기곤 한다.
오씨는 지난해 가족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단체 하이패밀리가 운영하는 ‘아버지학교’에 다니면서 ‘남자’에서 ‘아버지’로 시나브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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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다니며 ‘아이들이 잘못 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사라졌습니다. 또 아버지의 긍지는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사라진 시대, 아버지가 휘청대는 시대에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교육 및 가족 문제 전문가들은 ‘좋은 아버지’가 늘면 △밀실 음주문화 △여성의 외도 △아이들의 ‘왕따’ 등이 함께 줄기 때문에 가정뿐 아니라 사회도 밝고 맑아진다고 말한다.
○아버지 부재시대의 아버지
교육 및 가족 문제 전문가들은 아버지의 권위 상실이 위험 수준이라고 경고한다.
요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가족화(家族畵)를 그리게 하면 상당수는 어머니를 중간에 그리고 아버지는 도화지 구석에 그린다.
이 문제의 뿌리에는 아버지와 자녀간의 대화 상실이 도사리고 있다.
지난해 발간된 ‘2002년 청소년 보호백서’에 따르면 초등학생의 10%, 중학생의 17%, 고등학생의 22%가 아버지와 하루에 1분도 대화를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최근 대학문화신문사가 대학생 6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2%는 ‘아버지와 거의 대화하지 않는다’, 31%는 ‘하루 10분 이내 시간만 대화한다’고 응답했다.
이에 대해 아버지들은 “한국의 남성은 직장에서 과도하게 시달린다. 그런데 휴식이 필요한 집에서는 잠시도 쉬지 못하게 달달 볶는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과 김붕년 교수는 “직장 안팎의 변화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가정의 변화에 둔감하면 가족으로부터 좋은 아버지 대접을 못 받게 된다”며 “일찍 귀가해 좋은 아버지가 되면 술에 절어 살 때보다 직장 일도 잘하게 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되는 길
훌륭한 아버지 역할을 배우기 위해 ‘아버지학교’를 다녔던 오철승 이동은씨 부부가 아파트단지 놀이터에서 두 아들과 친구처럼 즐겁게 놀고 있다.-전영한기자
많은 남성이 “가정적인 아버지가 되겠다”고 결심하지만, 방법을 알려고 노력하지도 실천하지도 않아 실패하곤 한다.
하이패밀리 송길원 대표는 “많은 남성이 자신의 어릴 적 권위적인 아버지상을 고수하고 있지만 이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며 “특히 아버지의 역할을 자녀의 발달 주기에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녀가 초등학교 때까지는 같이 땀 흘리고 시범을 보이는 ‘코치’와도 같은 존재가 돼야 하고, 청소년 때에는 성문제, 폭력 문제 등에 대한 상담가가 돼야 한다. 또 자녀가 어른이 되면 독립된 인격으로서 친구와 같은 관계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또 아이들에게 명령하고 요구하기보다 우선 아이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권유한다. 이를 위해 ‘부모는 옳고 자녀는 틀리기 쉽다’는 생각부터 잠시 접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또 아버지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놀아주면서 자녀와의 벽을 허물게 되면 나중에 아이가 교육적인 지시도 훨씬 더 잘 따른다는 설명이다.
○“아버지 노릇을 배워라”
전국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아버지학교를 이용하면 상황에 맞는 아버지 역할을 배울 수 있어 좋다.
기독교 계통의 두란노아버지학교운동본부(www.father.or.kr)는 1995년 문을 연 이후 70여개의 지부를 통해 3만여명의 ‘학생’을 배출했고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이 학교 수료생의 카페가 50여개 등록돼 있다.
하이패밀리(www.hifamily.net)는 서울 강남구 양재동의 본부에서 기독교인반, 비기독교인반 별도로 아버지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직장인과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출장 강연도 하고 있다.
아버지가 네 살배기 아이와 노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도 있다.
연세대 어린이생활지도연구원(02-2123-3480)은 매주 토요일 아버지가 4세 유아와 함께 등록해 자신의 역할을 배우도록 하는 ‘아빠와 함께하는 영아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우현경 연구원은 “아버지들은 처음에 아이와 놀면서 어색해하지만 아이의 흥미를 알게 되고 반응을 살피면서 친해진다”며 “아버지가 자녀가 유아일 때 형성한 긍정적인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된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YMCA 좋은 아버지 모임’,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딸사랑 아버지 모임’ 등의 단체에 가입해서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고 배울 수도 있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이렇게 하면 좋은 아버지 된다▼
■ 좋은 아버지되기 9가지
△가족의 생일, 별자리, 혈액형, 친구, 자녀의 반과 담임선생님의 이름 등 가족의 신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아침, 저녁 중 적어도 하루 한 번은 가족과 함께 식사한다.
△1주에 몇 번이라도 출근 때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서거나 퇴근 때 아이와 함께 귀가한다.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안아주기, 볼 비비기 등의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말없이 멍하게 TV를 보는 시간을 줄인다. 그 시간에 아이들과 한자리에서 책을 읽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이하의 자녀에게 잘 때 책을 읽어준다.
△주말에 한 번은 거실이나 마루, 큰방 등에서 온 가족이 한 이불을 덮고 얘기하면서 자는 시간을 갖는다.
△‘자녀의 어머니’를 사랑한다. 핸드크림이나 편지를 그녀의 핸드백 안에 넣어놓는다.
△가족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은 가족회의를 통해 한다. 이때 아이들의 얘기를 경청한다.
■ 아이와 잘 놀아주려면
△아이를 이끌려고 하지 말고 아이 스스로 말하게 한다.
△아이를 놀라게 하거나 겁주지 않는다.
△‘○○○ 해라’는 명령형의 말투보다 ‘○○ 할래?’ 등 권유형이나 ‘네가 ○○한 걸 보니 화가 난 모양이구나’ 등 공감형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아이에게 “여자가 어떻게 그런 놀이를 하니?” 등 성 고정관념을 갖게 하는 말을 가급적 삼간다.
△선물이나 선심 공세를 삼가고 약속은 가능한 것만 한다.
△놀이는 자신이 즐길 수 있고 아이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되는 것을 우선시 한다.
△아이의 인지적 능력, 특징과 눈높이에 맞는 즐거움을 준다. 아이가 얘기하는 것을 잘하면 잠자기 전에 서로 이야기를 몇 마디씩 만들어 잇는 놀이를 하면 좋다.
△아이가 평소 놀던 패턴을 단박에 깨려고 하지 말고 틀을 존중한다.
△필요하면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도움말=하이패밀리 송길원 대표, 서울대 의대 소아정신과 김붕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