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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프로야구/마니아칼럼]박찬호의 '3전 4기'

입력 | 2004-05-13 19:45:00


'코리언 특급' 박찬호(텍사스 레인저스)가 '3전 4기' 끝에 감격의 2승을 거뒀다.

지난 달 17일 대 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 시즌 첫 승을 거둔 후, 3차례의 2승 도전에서 고배를 마셨던 박찬호가 '마의 2승 벽'을 드디어 넘어선 것이다.

박찬호는 13일(이하 한국시간) 탬파베이의 홈구장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열린 대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전에 선발 등판, 7이닝 동안 7피안타 5실점(5자책) 2볼넷의 투구를 선보인 동시에 탈삼진 5개를 곁들이며 팀의 9-8 승리를 견인, 자신의 시즌 2승(3패)째의 값진 승리를 거뒀다.

박찬호가 이 날 던진 투구수와 스트라이크 비율도 상당히 이상적이었다. 103개의 공을 던진 박찬호는 그 중 60개의 스트라이크를 기록, 효율적인 투구수 안배에 성공했다. 게다가, 경기 초반 두 개의 홈런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고비마다 위기를 넘기며 2승 고지까지 도달한 것. 한편, 전 날까지 5.50이던 시즌 평균자책은 5.65로 다소 높아졌다.

박찬호의 맞 상대 제레미 곤살레스는 올 시즌 승없이 4패에 6.12의 평균자책을 기록중인 상황. 결국, 박찬호가 평균 정도의 투구만 하더라도 승을 챙길 수 있었던 상황에서 초반 2개의 홈런으로 경기를 어렵게 끌고 갔다.

게다가, 9-5로 앞서던 9회 말 2사 후 로코 발델리와 어브리 허브의 연속안타로 3점을 허용, 8-9까지 막판 대 추격전을 허용하는 바람에 박찬호의 귀중한 승리가 날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긴박한 상황이 펼쳐지면서 이룬 승리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승리다.

1회 홈런 허용 '징크스'

트로이 글로스(애너하임 에인절스전, 3점)-카를로스 벨트란(캔자스시티 로열스전, 1점)-훌리오 루고(탬파베이 데블레이스전, 1점)등은 올 시즌 박찬호가 선발 등판해서 1회에 허용한 홈런 기록이다. 즉, '1회 홈런의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

이 날 역시 1회 대포 한 방을 허용, 악순환이 지속됐다. 2사 후 3번 어브리 허프와 정면승부를 피하다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출루시킨 뒤,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던진 한 가운데 직구를 4번 티노 마르티네스가 놓치지 않고 잡아당겨 우중간 펜스를 훌쩍 넘는 선제 투런 홈런을 날린 것.

경기 초반 출발은 이전 3경기와 다를 바 없이 불안한 출발이 이어졌다. 박찬호의 향후 등판시에도 1회 실투에 의한 홈런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작업이 '박찬호 부활'의 진단 시약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블레이락-소리아노', 백투백 홈런

마르티네스에게 기선을 제압당하는 2점포를 얻어맞은 텍사스 타선은 이은 2회 초 공격에서 선두타타 4번 브래드 풀머가 좌익선상을 타고 흐르는 2루타로 포문을 연 뒤, 1사 후 6번 데이빗 델루치의 희생플라이로 풀머가 득점, 1-2로 추격전을 펼쳤다.

박찬호가 실점하지 않고 2회 말을 넘기자, 텍사스 타선은 박찬호에게 힘을 실어주기라도 하는 듯, 곤살레스를 맹폭격했다. 3회 초 선두타자 '찬호 도우미' 8번 랜스 닉스가 우중간을 꿰뚫는 2루타로 추격전의 발판을 마련한 뒤, 9번 로드 바라하스와 1번 마이클 영이 각각 삼진과 범타로 물러나 동점 기회가 무산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텍사스에는 해결사 행크 블레이락이 타석에 서 있었다. 블레이락은 곤살레스의 2구째 낮은 직구를 걷어올려 우중간 펜스를 훌쩍 넘기는 역전 투런 홈런을 작렬시킨 것. 블레이락의 대포에 이어 3번 알폰소 소리아노의 좌월 백투백 솔로포가 터지면서 순식간에 4-2로 역전, 경기를 텍사스의 흐름으로 끌고 오면서 박찬호의 어깨를 가볍게 해줬다.

득점 후, 바로 홈런으로 실점

팀이 4-2로 리드를 잡아줬으면 선발투수는 그 리드 점수를 곧 이은 수비에서 지켜줘야할 도의적 책임같은 게 존재한다. 하지만, 올 시즌 쭉 지켜본 박찬호는 이 부분에서 항상 낙제점을 받아왔다.

3회 말 선두타자 9번 대미안 롤스를 좌전안타로 출루시킨 뒤, 1번 칼 크로포드의 2루 땅볼로 1루주자 롤스는 2루서 봉살되어 1사 1루의 위기를 맞았다. 2번 로코 발델리를 볼넷으로 출루시킨 뒤 3번 어브리 허프에게 통한의 우월 3점포를 또 허용했다. 바로 4-5 역전을 허용한 것이다.

하지만, 텍사스 타선의 찬호 지원도 놀라운 수준. 4회 초 데이빗 델루치가 볼넷으로 진루한 뒤, 케빈 멘치가 존 할라마의 초구를 밀어쳐 우측 폴대를 맞히는 행운의 홈런을 터트렸다. 멘치의 투런 홈런은 2004시즌도 부활의 빛이 꺼져가던 박찬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거나 다름없을 정도. 그야말로 천금과 같은 홈런이었다.

리드를 잡아준 텍사스 타선에 고마움을 표시할 겨를도 없이 박찬호는 4회 말 또 다시 역전의 위기를 맞았다. 1사 후 7번 저프 블럼에게 2루타를 허용한 뒤 8번 토비 홀에게 유격수 앞 내야안타를 맞아 1사 1,3루의 역전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9번 대미안 롤스를 6-4-3 더블 플레이로 처리하며 이 경기 '최대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찬호의 데드 포인트는 '#75'

박찬호의 투구수 데드 포인트는 75구란 분석을 지난 5일 탬파베이전에서 내린 바 있다. 박찬호는 75구를 전후해서 피안타율의 극심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61~75구 구간의 피안타율은 무려 .435인 반면 76~90 구간의 피안타율은 .200에 불과하다.

즉 4,5회만 잘 넘기면 박찬호는 오히려 이전보다 좋은 투구를 보일 확률이 높아진다는 통계가 나온 것. 이 날 허샤이저가 데드 포인트에서 박찬호를 강판시키지 않고 계속 믿고 끌고간 결과, 박찬호는 5회 말 수비를 삼자범퇴로 처리하는 등, 6회와 7회까지 3이닝 연속 무실점 투구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찬호 'K 세리머니'의 재현

박찬호의 세리머니는 독특하다. 멀리서 보더라도 그만의 'K 세리머니'는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에만 나온다. 올 시즌 무실점 역투로 완봉승을 따내던 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 특유의 'K 세리머니'를 선보인 이후 자취를 감췄었다.

이 날 6회 말 바로 그 'K 세리머니'가 세이프코 필드가 아닌, 트로피카니 필드에서 재현된 것이다. 1사 후 5번 훌리오 루고를 몸에 맞춰 1루로 내보낸 박찬호. 6번 미드레 커밍스 타석에서 포수 로드 바라하스의 에러로 루고는 2루까지 진루, 다시 한번 동점의 위기를 맞는듯 싶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커밍스와 블럼 두 타자 중 한 타자에게만 안타를 맞더라도 또 다시 2승은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순간. 박찬호의 집중력과 강한 승부 근성은 위기에서 오히려 빛을 발했다. 박찬호가 커밍스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7번 블럼마저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운 것. 이 순간 박찬호는 승리를 확신하는듯 오른쪽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며 시애틀전에서 보여줬던 바로 그 감격적인 'K 세리머니'를 재현했다.

쇼월터의 '인내(忍耐)'가 엮어낸 감동적인 승리

야구라는 스포츠는 휴먼 스토리일 때가 가장 아름답고 그 빛을 강하게, 그리고 오래 발산하는 법이다. 바로 그런 휴먼 스토리가 이 날 경기에서 전개됐다. 1회 말 마르티네스에게 선제 투런 홈런을, 그리고 4-2로 역전시킨 3회 말에 어브리 허프에게 4-5로 재역전당하는 스리런 홈런을 허용한 박찬호. 그를 지켜보는 덕아웃의 쇼월터는 그야말로 좌불안석 그 자체.

4회초 멘치의 2점 홈런으로 다시 6-5의 리드를 잡은 상황에서 박찬호는 또 다시 1사 1,3루의 재역전 위기를 맞았다. 그 순간 오럴 허샤이져 투수코치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또 다시 박찬호의 강판인가?'라며 온 국민들이 가슴을 졸이던 그 순간 허샤이져는 박찬호의 손에 있던 공을 뺐지 않았다.

그 후, 박찬호는 그가 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력을 다해 해냈다. 자신을 믿고 인내해 준 쇼월터 감독에게 감사하는 승리를 선사하려는 듯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을 연신 훔쳐내며 던지고 또 던졌다. 그리고 그는 트로피카나에서 '마(魔)의 2승 벽'을 넘어 감격적인 승리를 거뒀다.

찬호, 2004 '텍사스 동화(童話)'에 동참하라.

박찬호는 그 동안 2선발의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등판 간격의 조정이 그 예. 박찬호의 이 날 등판은 7일 쉬고 8일 째 올라온 것. 게다가, 불펜 대기 명령과 같은 치욕적인 명령에도 박찬호는 적절한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바로 그의 저조한 시즌 성적때문이었다.

올 시즌 아메리칸리그 꼴지를 면치 못할 것으로 예상됐던 텍사스가 애너하임과 지구 선두를 다투는 지구 최강자로 등장하는 동화같은 스토리가 전개되는 동안, 박찬호는 동화 스토리의 중심에서 이탈했었다.

게다가, 2승 도전에 실패한 뒤 3주 이상 텍사스 언론이 펼쳐놓은 도마 위에서 요리당하는 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제는 박찬호도 팀 내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는 '2승 투수'로 당당히 올라섰다. 박찬호의 선발 로테이션 제외를 언급하던 텍사스 지역언론의 신랄한 비난을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것. 이 날 거둔 승리의 숫자 '2'에 잠재된 의미다.

이제 박찬호도 텍사스가 그려내는 2004시즌 '동화같은 스토리'에 본격적으로 동참할 필요가 있다. 바로 탬파베이전 중반 5-6-7, 연속 3이닝에서 보여준 그의 힘찬 투구는 이미 그 가능성을 내비쳤다. 단, 경기 초반 집중력을 좀 더 높이고, 위기시 정면돌파 능력만 제대로 발휘한다면 '마의 벽 2승'을 넘어선 박찬호에게 현 상황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 예상해 본다.

이일동 동아닷컴 스포츠리포터 sp5dnlwm@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