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출신 재일(在日) 역사학자 강재언 박사는 ‘왜 한국은 자율적인 근대화에 실패해서 식민지로 전락했을까’를 평생의 화두(話頭)로 삼고 연구해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나라 없는 백성의 고뇌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1876년 일본을 방문한 제1차 수신사 김기수의 일동기유(日東記游)에 적힌 내용이 소개돼 있다.
김기수가 일본에 갔을 때 접대를 맡은 일본 관리 구키 류이치가 물었다. “귀국의 학문은 오로지 주자(朱子)만을 숭상합니까. 그 밖에 숭상하는 다른 것이 있습니까?”
김기수의 답변은 이랬다. “우리의 학문은 500년 동안 오직 주자를 알 뿐입니다. 주자를 배반하는 자는 즉시 난적(亂賊)으로 처단합니다. 과거에 응시하는 문자에도 불교와 노자의 말을 쓰는 자는 귀양 보내어 용서하지 않습니다.”
강 박사는 조선의 몰락은 주자학, 특히 현실과 동떨어진 성리학에 치중하면서 실학(實學) 성격의 다른 모든 학문을 배척한 ‘주자일존(朱子一尊)’에 큰 원인이 있다고 분석한다. 또 권력과 야합한 ‘정통’이 상대방을 ‘이단’으로 몰고 압살하는 정신적 풍토가 사상과 학문의 침체를 초래했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소중화(小中華)’의 공허한 명분보다 국가와 백성의 현실 개선에 눈을 돌리자고 주장한 실학파와 양명학파는 조선후기 사회를 바꾸는 촉매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 강경 주자학파는 이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숙청했고 결국 조선은 안에서 무너져 내렸다.
눈을 현실로 돌리면 ‘조선의 실패’를 떠올리게 된다.
집권세력 일부 인사와 사회 각 부문의 응원부대는 소리 높여 ‘개혁’을 주장한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민간부문에 대한 정부개입 확대라는 시대역행적 정책을 개혁 구호로 포장한 것도 적지 않다. 명분을 앞세운 왜곡된 현실인식이 국민의 삶을 더 팍팍하게 하고 나라를 멍들게 할 수 있다는 경고는 ‘반(反)개혁론자의 준동’으로 몰아붙인다. 현대판 사문난적이니 입을 다물라는 것인가.
지나친 위기의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국내외 흐름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지금 한국이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당장의 경기침체도 문제지만 미래의 성장잠재력 추락이 더 큰 고민이다. 반시장적, 반기업적 풍조가 팽배하고 권력이 이를 부추긴다면 진정한 경제 재도약은 물 건너간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나라곳간(재정)에서 허겁지겁 메우는 식의 미봉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실사구시와 부국강병을 중시하는 인식을 탄압한 조선의 맹목적인 주자학 추종세력은 현실 권력투쟁에서는 이겼지만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갔다. 과연 오늘 한국의 정부여당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의 결정이 역사에서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권순활 경제부차장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