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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작가주의 만화가 박흥용씨 옛 작품모은 단편집 내

입력 | 2004-05-17 17:49:00

최근 단편집 ‘박흥용 1986∼1992’를 낸 박흥용 작가. 그는 이 책의 수록 작품들에 대해 “혼란 자체에 묻혀 현실을 조명하는 정도”이라고 말했다. 변영욱 기자


“1996년에 나온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제 첫 작품으로 아는 독자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예전에 이런 작품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요. 물론 독자나 선배들이 ‘책을 내라’고 코너로 몰았지만….”

조선시대 천민의 한을 묘사한 ‘구르믈…’ 등으로 작가주의 만화가로 평가받는 박흥용씨(43)가 단편집 ‘박흥용 1986∼1992’(청년사)를 펴냈다. 이 책은 이 시기에 발표한 ‘2등 인간’(86년) 등 18편의 단편을 모았다.

박씨는 이 책의 ‘여는 글’에서 ‘옷을 벗은 몸으로 대로를 걷는 것처럼 민망해 (출판을) 피해 왔었지만’이라고 밝혔다. 그는 15일 오전 서울 세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을 때도 작품에 대해 말하기 쑥스러워했다. 아끼는 작품이나 인물을 물어도 곧장 “없다”고 답했다. 자신의 눈에는 자신의 작품이 부족해 보인다는 뜻이었다.

단편집에 수록된 ‘하늘’은 컬러로 다시 만들어져 작가의 원래 의도가 한층 돋보인다. 이 작품은 대사 한 마디 없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표현했다. 마지막 장면은 진압군이 지나간 뒤 세 마리의 새가 피 같은 붉은색 하늘을 날아가는 것으로 당시의 비극을 상징했다.

1987년 처음 발표됐을 때 이 작품은 흑백만화로 나와 새들은 평화와 희망의 상징으로 읽혔으나 이번에는 붉은 색 하늘로 표현돼 ‘새의 날개’는 한층 더 중의적 의미를 지니게 됐다.

“당시에는 ‘광주’의 언저리만 얘기해도 문제가 됐습니다. ‘하늘’도 일본에 볼일이 있어 갔을 때 맞춰 발표했습니다. 귀국 후 별 문제는 없었지만.”

누구를 위한 군대인가를 묻는 만화 ‘늙은 군인의 노래’. 그림제공 청년사

‘늙은 군인의 노래’(86년)도 ‘누구를 위한 군대인가’라는 주제로 광주의 아픔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한다. 늙은 군인의 혼이 입대를 앞둔 청년에게 “겨레의 적이란 손에 쥐게 될 총을 믿고 기성세대와 야합하려 하는 자네 마음속의 기회주의”라고 질책한다.

다른 수록작들도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연출서곡’(86년)은 어릴 적 꿈을 잃고 사회의 한 부품으로 전락한 샐러리맨의 비애를 그렸다.

“달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약자들의 이야기만 알았어요. 이런 작품들이 ‘흥행 만화’가 아니었던 점은 확실하죠.”

박씨는 10여년 전과 비교할 때 지금은 능동적이 됐다고 자평했다. 그는 “그 때는 혼란 자체에 묻혀 현실을 조명하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구르믈…’처럼 그 혼란을 벗어나려는 몸동작을 표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구르믈…’은 2005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준비위원회가 선정한 ‘한국의 책 100’에 선정됐다. 그는 “너무 큰 영광이라 그런지 별 느낌이 없다”고 말했다.

“일본과 다른 ‘우리 만화’를 그려야 합니다. 한국 영화도 한때 할리우드 일색이었지만 이제 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잖아요. 일본 만화와 게임, 인터넷에 몰두하는 독자들도 제대로 된 우리 작품만 만나면 돌아올 겁니다.”

조경복기자 kath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