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자력은 과학기술의 상징이며 국력의 상징이었다. 산업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자력 개발 및 이용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제반 문제들은 ‘논외’였던 것이 사실이다. 원자력관련 정책결정 과정에서 과학기술 체계만 중시될 뿐 사회적 파장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취급됐던 것이다.
원자력개발은 고도의 과학기술과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원자력 개발사업의 시행과정에서 정부의 중앙집권적인 조정과 관할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 원전수거물 등에 대해 일반인이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이 사회심리적으로 확산 증폭되면서 사회체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사안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
원자력 사업은 개발과 연구에 한정할 때에는 과학기술의 영역이지만 이용과 처리의 측면에서는 사회과학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부지선정 등의 사안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신뢰뿐 아니라 사회적 수용성(受容性)을 제고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부지선정의 사회적 수용성을 제고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건은 정책결정과정의 투명성이다. 전문가와 주민을 포함한 다양한 이해집단들간에 진지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적이어야 한다. 숙의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은 ‘합리적 사고를 하는 이해관련 사회집단들의 진지한 참여’를 전제로 한다. 이는 ‘다수결의 원리’에만 집착하는 집합민주주의가 범하기 쉬운 감정적 예단과 비합리성을 배제한 의사결정을 말한다.
지난해 부안사태는 자치단체장의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유치 청원만 갖고 상황을 처리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정부가 2월 새롭게 발표한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부지선정 관련 정책은 부안사태에 대한 ‘반성’이 담긴 것으로 평가된다. 단체장의 단독 신청으로 이뤄졌던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 전체 주민 3분의 1 이상이 찬성하는 주민 청원이 제기되면 단체장이나 지방의회 등이 예비신청을 할 수 있고, 예비신청이 완료되면 다시 주민투표를 거쳐 본신청을 하도록 했다. 본신청 이후 부지선정 심사도 주민들이 참여하는 ‘부지선정위원회’를 통해 진행토록 하는 등 정책결정과정의 투명성을 높이려는 의지가 보인다.
이런 절차가 원활하게 진행되려면 무엇보다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정부와의 쌍방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현재 정부 관계자와 환경단체 등 전문가들로 구성된 에너지 원탁회의나 민관포럼의 한계를 넘어,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역주민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광역설명회 등의 제도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또 각 지자체에 상시 창구를 마련해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수용성을 구체적이고도 지속적으로 고려하는 과정을 거칠 때에만 17년간 오해와 반목으로 해결점을 찾지 못했던, 그러나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를 풀어나가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안형기 건국대 교수·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