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바보’로 불린 때가 있었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DJ당’ 간판으로 부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노 후보에게 한 네티즌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뻔히 떨어질 줄 알면서도 지역주의 벽에 도전한다며 잇따라 부산 출마를 고집하는 노무현의 신념에 대한 경의(敬意)를 ‘바보’라고 표현한 것이다. ‘바보’에 대한 경의는 빠르게 사랑으로 확산됐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모였고, 2년 후 ‘바보’가 대통령이 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거기까지였어야 했다. 노사모는 그들이 사랑하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작별을 고해야 했다. 사랑하는 마음이야 변하지 않더라도 ‘대통령 노무현’을 그때 떠나보내야 했다. 사랑이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헤아려야 했다. 주되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그쳐야 했다.
우리가 무엇을 바랐다고 그러는가. 우리는 그저 노무현을 사랑하고 지키는 것일 뿐. 그들은 그렇게 말할지 모른다. 또 그 말이 과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젠 정말 사랑하는 이를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
▼‘노짱’은 이제 외롭지 않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대통령의 특정 시민단체에 대한 편파적 행동은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의 집단과 그를 지지하지 않는 국민의 집단으로 나라가 양분되는 현상을 초래함으로써, 모든 국민의 대통령으로서 국가공동체를 통합시켜야 할 책무와도 부합하지 않으며, 나아가 정부 전반에 대한 국민의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세상에, 나라가 양분되고 대통령의 책무에도 맞지 않으며 정부에 대한 국민 불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랑을 누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랑이라면 하루빨리 거둬야 한다.
하기야 4·15총선 이전까지는 노 대통령에게 그들의 사랑이 간절했을 수도 있다. 거대야당에 포위된 소수정권인 데다 국민의 지지도 뚝 떨어진 외로운 처지에 그들의 변치 않는 사랑이야말로 눈물을 쏟을 만큼 고마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노짱’은 외롭지 않다. 거대야당의 무리한 대통령 탄핵으로 열린우리당은 일거에 원내과반수 정당으로 변모했고, ‘노짱’을 괴롭히던 ‘적장’들도 거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한마디로 형편이 확 핀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형편이 폈다고 해서 공동체의 형편까지 피리라는 보장은 없다. 대통령이 상생(相生) 정치를 얘기하고, 되도록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고 해서 분열과 적대로 찢어진 공동체가 단숨에 화해와 통합을 이뤄낼 수는 없다. 통합의 리더십이 행동과 구체적인 결과물로 이어질 때만이 화해와 통합의 기운이 찾아들 것이다.
노사모가 대통령을 놓아주는 것은 노 대통령이 집권 2기를 새롭게 열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들이 대통령에 대한 사랑을 계속 독점하려 한다면 대통령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도 좀처럼 마음을 열려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성공하려면 노사모의 사랑만으로는 안 된다. 다수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의 대통령’이어야 한다. 노사모가 거기에 걸림돌이 돼서야 되겠는가.
▼집권 1기 실패 되풀이 말아야▼
역사는 과거의 현실이다. 분단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의 숨 가쁜 현실에 어찌 명암(明暗)이 없었겠는가. 그러면서도 한걸음씩 내디뎌 온 총체적 모습이 오늘이다. 대통령과 집권측은 큰 숨으로 역사를 보고 공동체의 내일을 위해 새로운 동력(動力)을 이끌어내야 한다. 새 동력은 국민의 통합된 에너지에서만 추출될 수 있다.
노사모는 내 편이라는 식의 이분법으로는 국민의 에너지를 한데 모을 수 없다. 여전히 과거의 현실에서 비롯된 비주류의식의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독선의 개혁에 매달린다면 세상은 다시 반목과 투쟁의 장(場)으로 변할 것이다. 집권 1기의 실패가 반복돼서는 탄핵 기각은 의미가 없다. 노사모는 이제 대통령을 놓아줘야 한다. 그것이 옳은 사랑법이다. 노 대통령의 집권 2기는 노사모와의 이별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전진우 논설위원실장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