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음식 등 유행에 변화무쌍한 뉴욕에서 요즘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식당은 ‘마쯔리’라고 하는 퓨전 일본음식점입니다. 맨해튼에 자리 잡은 이 곳은 일본풍의 차분하고 그윽한 조명에 뉴욕의 화려한 에너지를 절묘하게 섞어 놓은 실내장식으로 멋쟁이 뉴요커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할리우드에서 미술 감독을 하고 있는 미국 친구 포드의 안내로 그 곳에서 영화 때문에 알게 된 친구들과 지난 토요일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프로듀서인 네다와 어델, 그리고 영화 ‘델마와 루이스’ ‘데드맨 워킹’에 출연한 배우 수잔 서랜든이 함께 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반갑게 서로를 포옹하며 즐겁게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따뜻하면서도 재치 있는 성격의 포드는 이란계 미국인인 네다와 저에게 “‘악의 축’의 나라에서 왔다”며 농담을 던졌습니다. 제가 북한이 아니라 한국에서 왔다며 주의를 줘도 그는 어쨌든 같은 한국 아니냐며 계속 농담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북한을 일방적 시선으로 ‘악의 축’ 또는 ‘불량 국가’로 규정하고 몰아붙이는 자국 정부의 방침을 몹시 부끄러워했습니다.
수잔 역시 대표적 반전 운동가이기도 한 배우 팀 로빈스를 남편으로 두어서인지 이라크 전쟁의 당위성이 부족함을 역설했고, 저 또한 요즘 한국에서도 이라크 파병에 대해 신중히 재고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화제가 저로 바뀌어 제가 최근 한국에서 촬영을 마친 영화 ‘투 가이즈’에 대해 얘기하게 됐습니다.
한국의 차태현이라는 코믹 배우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코믹 배우의 대표적 선배격인 저를 더 설명해준 다음 “두 배우가 같은 영화에서 만났으니 영화가 얼마나 즐겁고 유쾌하겠느냐”며 신나서 얘기했지만 그들은 표정이 별로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그 영화 얘기를 하면 많은 분들이 웃기겠다며 기대하지만 그들에겐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 당연하겠지요. 와인 몇 잔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마친 뒤 숙소가 같은 방향인 저와 포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밖에 나와 보니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지만 갑자기 쏟아진 폭우 때문에 맨해튼의 밤거리는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택시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빈 택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비를 피해 건물 처마 밑에서 택시를 기다리다 포기하고 지하철로 내려갔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전철도 30분이 넘도록 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걸어서 각각 자신의 집과 호텔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끼는 재킷을 머리위에 뒤집어쓰고 장대비를 맞으며 30, 40분을 추적추적 걸어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지만 시차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비 내리는 창 밖의 맨해튼을 커피 한 잔이 식도록 멍하니 내려다봤습니다. 20대 유학시절의 많은 추억이 서려 있고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한 뉴욕…. 브로드웨이, 워싱턴스퀘어광장, 허드슨강…. 그래서인지 저에게 뉴욕은 늘 각별하고 다정한 곳이었습니다. 또 올 하반기부터 제가 출연하는 미국 영화촬영을 위해 이곳에서 수개월간 머물러야 합니다.
하지만 4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왔던 우리나라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있기 때문일까요?
당연한 얘기지만, 제가 아무리 뉴욕을 좋아하고 뉴욕이 저를 반갑게 맞아줘도 전 역시 ‘이방인’일 뿐입니다.
비를 쫄딱 맞고 와서 그런가요? 자꾸 그런 생각이 더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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