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국 정부에는 장관이 14명이지만 건국 초기에는 장관이 5명밖에 되지 않았다. 국무장관 재무장관 법무장관 체신장관 그리고 전쟁장관이 그 면면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전쟁장관이다. 이 직책은 지금은 국방장관이라 불리지만 1950년대 초 트루먼 대통령 때까지는 전쟁장관이라고 불렸다.
조금 생각해 보면 전쟁장관이라는 이름이 사실은 더 솔직한 이름이다. 1812년 영국과의 전쟁 이후 적군이 미국 본토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으니, 미국 국방장관의 주요업무는 사실 ‘방어’라 할 수 없다. 이름과 실체가 다른 것이다.
▼경제수준 비슷해야 서로가 이득▼
그런데 이처럼 이름과 그 실체가 다른 것 중의 하나가 최근 우리나라가 칠레와 체결했고 싱가포르, 일본 등 여러 나라와 체결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양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양자간의 자유무역협정은 사실 진정한 자유무역협정이 아니다. 협정당사국간에는 자유무역이 이뤄질지 몰라도 그 외의 나라들에 대해서는 보호무역을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맺어 칠레 농산물을 관세 없이 수입한다면, 이는 다른 나라 농산물에 대한 무역장벽을 상대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즉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모든 나라에 동시에 개방하지 않는 한 진정한 자유무역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이 진정한 자유무역의 원리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정책이 그렇듯이, 자유무역은 상황에 따라 득이 될 수도 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 수준이 유사한 두 나라가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면 서로 시장이 확대되고 국제 분업과 경쟁이 촉진돼 둘 다 득을 볼 확률이 높다.
그러나 경제발전 수준에 격차가 큰 나라들끼리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면 단기적으로는 서로 더 싼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어 둘 다 이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선진국은 이익을 보고 후진국은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생산성 격차가 작은 경우는 자유무역에 의해 경쟁이 증가하면 후진국의 생산성이 올라갈 확률이 높지만, 생산성 격차가 큰 경우는 후진국의 기존산업이 도태되고 새로운 산업이 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선진국들도 자신들이 후진국일 때에는 자유무역을 회피했다. 일본의 경우를 보자. 1960년대 말 일본의 모든 자동차 회사의 생산량을 합쳐도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 한 회사의 생산량의 반도 되지 않았다. 이때 자유무역론자들은 일본은 비교우위가 없는 자동차 산업을 억지로 육성하지 말고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따랐다면 오늘날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일본의 자동차 산업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얼마 전 우리나라를 흔들었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은 사실 장기적으로는 칠레보다는 우리에게 더 득이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피해를 볼 우리 농민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책이 없이 정부가 이 협정을 추진했던 점은 비판받아야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이것이 우리나라에 유리한 협정임은 분명하다.
▼생산성 격차 크면 후진국에 불리▼
같은 원리로 일본과의 자유무역협정은 우리에게 득보다 실이 많다. 우리나라는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는 기술 수준이 일본보다 20∼30년 뒤져 있는 상대적 후진국이다. 한-칠레 협정에 대한 농민의 반대를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붙이는 데 앞장섰던 기업들이 한일 협정에 대해 신중론을 펴는 것이 바로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정부도 이 점을 감안해 일본과의 경우에는 ‘민감한’ 품목을 여럿 제외하고 협정을 맺으려 한다지만, 중요한 품목을 죄다 뺀다면 왜 굳이 자유무역협정을 맺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자유무역협정, 특히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선진국들과의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런 협정은 사실 진정한 자유무역으로 가는 길도 아니며 장기적으로는 우리에게 득보다 실이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