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의 역사는 몰라도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문법을 몰라선 안 된다. 그에 못지않게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이 철자법 또는 정서법이다.
17세기 초 유럽에 처음 등장한 옛 신문들엔 사람마다 제멋대로 글을 썼다. 모차르트의 편지를 보면 프랑스혁명 전야의 18세기 말까지도 정서법은 확립되지 못했던 것 같다.
청년 이승만이 탐독했다는 1907년판 ‘월남망국사’는 “世界(세계)에公理(공리)가何有(하유)ㅱ리오,오작强權(강권)ㅱ이라”로 시작된다. 1929년에 초판이 나온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책머리 첫마디도 “혹은이를우스리라”고 기술해 철자나 띄어쓰기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왕이 법’ 아니라 ‘법이 왕’▼
리오’가 ‘하리오’로, ‘오작’이 ‘오직’으로, 또는 ‘우스리라’가 ‘웃으리라’로 표기된 것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어학회가 ‘철자법 통일안’을 마련하면서부터다. 오늘날 한글맞춤법이라고 일컫는 이 철자법통일안에는 그 전엔 없던 까다로운 표기들이 많다.
청년 이승만이 수십 년의 망명생활에서 돌아와 노년에 대통령이 되자 도무지 복잡한 한글맞춤법을 익힐 수가 없었다. 1953년 이 대통령은 정부의 문서와 교과서 등에서 현행 철자법을 폐지하고 구식 기음법(記音法)으로 돌아가라고 다그쳤다. 이른바 ‘한글파동’의 단초다. ‘문자의 반혁명’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이 한글파동은 그 뒤 ‘권력과 법’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내 머리에 예시적인 사건으로 떠오르곤 한다. 중국의 황제는 문자도 멋대로 고쳐 썼다던가.
철자법을 바꾸라고 다그치고 문자도 고쳐 썼다는 동양의 제왕이나 제왕적 대통령의 경우를 볼 때마다 그와 대비해서 되새겨 보는 것이 황제들의 전기를 쓴 2000년 전 로마의 문인 수에토니우스의 말이다. “황제도 문법학자 위에 설 수는 없다.”
글을 쓸 때엔 황제도, 백면서생도 문법 앞에서 평등하다. 문법의 지배를 수용함으로써 문장의 근대화가 이뤄졌다면 법의 지배를 수용함으로써 정치의 근대화는 시작됐다.
어느 누구도 법을 초월할 수 없다는 ‘법 앞에서의 평등’, 어느 누구도 법에 의하지 않고는 다스릴 수 없다는 ‘법치주의’는 산업화, 민주화보다 앞섰던 서양 근대화의 기본원리다. 시민사회는 ‘왕이 법’이 아니라 ‘법이 왕’이라는 원리를 관철함으로써 성립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20세기 한국의 근대화가 남긴 미완의 숙제가 법치주의의 확립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이 철자법을 고치라 야단치고 남북관계에선 ‘통치행위’라는 명분 밑에 보통사람에겐 금지되는 일이 실정법을 무시하고 자행되는 곳에서 법치주의의 확립은 요원하다.
지난 대선에서 나는 한줄기 희망을 보는 듯했다. 양대 정당이 모두 ‘육사’나 ‘투사’ 아닌 ‘율사’ 출신의 후보를 내세웠으니 누가 당선돼도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세기 초 한국의 역사적 과업을 이룩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후 여러 행적은 우리를 어리둥절케 했다. 현행법이나 헌법에 비추어 저래도 되는 것인지 하고…. 그러다 마침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라는 건국 이래 초유의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법치주의 확립 계기돼야▼
그로부터 두 달 만에 내려진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문은 정치인들의 싸움소리와 억지소리만 듣던 귀에 참으로 오랜만에 이로(理路)정연한 이치의 소리로 다가와 신선하기조차 했다. 난장판 국회에서 이뤄진 대통령 탄핵이 그래도 국민과 역사에 준 선물이 있다면 무엇일까. 대통령도 헌법과 실정법 위에 설 수 없다는 ‘법의 지배’ 원리를 입증했다는 점이다. 헌재 결정문은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현행법의 정당성과 규범력을 문제 삼는 행위는 법치국가의 정신에 반하는 행위이자 헌법을 수호해야 할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밝혔다.
어떻게 보면 노 대통령은 현행법과 헌법을 소홀히 함으로써 오히려 대통령 위에 법이 있다는 대원리를 시위한 셈이다. 노무현식 ‘살신성인’이라고나 할 것인지.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