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동양사학계의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서울대 총장을 지낸 고병익(高柄翊·사진) 박사가 19일 오후 3시45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0세.
1924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고인은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오카(福岡)고교를 거쳐 43년 도쿄(東京)대 동양사학과에 입학했다. 광복 후 귀국해 47년 서울대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고인은 48년부터 서울대 사학과 강사로 교단에 섰다. 6·25전쟁 와중이었던 52년에는 피란지인 부산에서 ‘역사학회’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54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56년 뮌헨대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고인은 연세대, 동국대 교수를 거쳐 62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79∼80년 제14대 서울대 총장을 지냈다. 이어 80∼82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 82∼91년 한림대 교수로 재직하며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서울대뿐 아니라 다른 대학 대학원에서도 동양사 과목을 가르쳐 고 민두기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들과 현재 한국 동양사학계에서 활동 중인 50대 중반 이상의 학자 대부분이 고인의 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인은 상아탑에만 머물지 않았다. 도산서원 원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21세기 한일위원회 위원장,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자들에게는 “상아탑에만 머물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라”고 가르치며 솔선수범했다.
연구자로서 고인은 한국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도 균형 있는 시각을 제시해 왔다.
고인은 ‘아시아의 역사상’ ‘동아교섭사의 연구’ ‘동아사의 전통’ ‘동아시아의 전통과 근대사’ ‘동아시아의 전통과 변용’ 등의 논저를 남겼고, 칠순이 넘은 뒤에도 ‘동아시아 문화사 논고’(1997년), ‘세월과 세대’(1999년) 등을 집필했다.
마지막 6개월간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영문 저서인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역사에 관한 연구(Essays on East-Asian Cultural Tradition and History)’(소화출판사 출간 예정)의 집필을 끝내고 서문까지 마무리 지었다. 제자인 김용덕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선생님께서 이 책의 출간을 생전에 보고 떠나시겠다고 하셨는데 끝내 눈을 감으셨다”며 안타까워했다.
고인은 대한민국학술원 저작상(1974년), 위암학술상(1996년), 용재학술상(2000년) 등을 수상했고 금관문화훈장(1997년)도 받았다.
유족으로는 윤환(潤煥·배성기연실업 상무), 문환(汶煥·현대증권 부장), 혜령(惠玲·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재령(在玲·주부)씨 등 2남2녀와 사위 장배식(張培植·배성기연실업 대표), 조동영(趙東榮·일건종합건축사 대표)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영안실 2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2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묘지다. 02-760-2011
김형찬기자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