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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나바시 요이치 칼럼]이라크 철수 ‘언제 어떻게’

입력 | 2004-05-20 19:01:00


이라크 바그다드 연합군 사령부 앞에서 과도통치위원장이 암살당한 사건은 이라크의 현실이 얼마나 암담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이라크 국민에게는 민주주의보다, 전기보다, 치안이 더 절실하다. 미국과 영국 중심의 점령군은 이라크 재건과 치안 회복이라는 최소한의 임무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다음 달 말까지 주권을 과도정부에 이양하고 내년 1월엔 선거를 실시해 새 정부를 수립한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 ‘폴 브리머 미 군정 최고행정관이 뽑은 사람들이 선출한 사람들에 의한 선거’라는 점에서 새 정부도 ‘괴뢰정권’으로 몰릴 위험이 크다.

선거를 치르지 못하면 이라크에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군과 영국군은 언제까지도 철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점령기간이 길면 길수록 선거 실시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점령은 테러를 유발하고, 미군은 보복한다. 미국에 대한 이라크 사람들의 증오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와 함께 패배자이자 소수파로 전락한 수니세력은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을 강화할 것이다. 남부 시아파는 ‘다수의 전제(專制)’에 의한 이슬람국가 건설을 밀고 나갈지도 모른다. 북부 쿠르드족은 독립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선거를 실시해도 정당은 종교와 민족과 부족을 축으로 모이고, 정치도 사회도 제각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국가 재건은 어렵다. 국가 재건에는 국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이라크에서는 ‘이라크인’이라는 인식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점령군에 대한 저항만이, 반미 민족주의만이 ‘이라크인’이라는 공감대를 유지시키는 게 현실이다.

포로학대사건과 맞물려 철수론이 미국 내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보수파인 한 퇴역 장군은 “빨리 철수해 피해를 줄일지, 늦게 철수해 피해를 키울지 둘 중 하나”라며 ‘손절매(損切賣)’ 철수를 주장했다.

군 내부에서도 이라크 작전의 실패를 공공연히 언급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술적으로는 이겼을지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지고 있다.”(미 82공정사단 사령관)

“모든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졌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이라크에 있는지 우리 자신이 모르기 때문이다.”(이라크전쟁의 전략계획을 담당한 미군 장교)

“미국은 빠지고, 유엔에 맡겨라”라고 누구나 얘기한다. ‘주권은 이라크 사람의 손에, 행정권은 유엔의 손에’라는 역할 분담이 가능하다면 좋지만, 현 상황에선 유엔도 뛰어들기 어렵다. 새로 군대를 보내겠다는 나라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동원하자는 의견은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떨어져 나갔고 프랑스와 독일은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이라크에 주권을 이양한 뒤 새 정부가 미국과 동맹을 맺고, 새 정부의 요청에 의해 미군이 주둔한다는 구상도 있다. 문제는 그런 정권을 이라크 국민이 신뢰할 것이냐는 것이다.

모든 대안이 쉽지 않다. 하지만 사이공 함락 때처럼 계산을 잘못해 도망치는 일이 또 생겨서는 안 된다. ‘출구전략’을 짜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조지 W 부시 정권은 이라크전쟁에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정치적 결단을 늦추면 늦출수록 이라크의 분해 과정은 빨라지고 이 나라는 ‘파탄 국가’로 전락할 것이다. 일본도 허둥지둥 철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면 출구전략을 검토해야 할 때다.

후나바시 요이치 일본 아사히신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