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장터는 물건뿐 아니라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향수를 덤으로 얻어오는 여행지다.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 열리는 강원도 봉평장은 옛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물건들이 많다(왼쪽). 장터에 나온 닭들(오른쪽 위). 봉평장에는 들소리패가 비정기적으로 문화공연을 펼친다(오른쪽 아래).
상품 가격을 1원 단위까지 표시해 바코드로 계산하는 도심의 쇼핑센터들은 편리하긴 하지만 왠지 정감이 가지 않는다. 이럴 땐 훈훈한 인정이 살아있는 장터가 그리워진다. 말 한마디 잘 하면 깎아도 주고 덤도 받는 그런 시골장터는 사라진 것일까.
최근 나발 불고 상모를 돌리던 그 옛날의 광대들이 다시 돌아와 시골장터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문화마을 들소리패. ‘찾아가는 장날’ 프로젝트를 기획해 전국 5일장을 찾아다닌다. 4일 성남 모란시장을 시작으로 10월까지 강원도 봉평장, 대화장 등을 돌며 신명나는 공연을 펼치는 ‘문화보부상’ 들소리패와 함께 색다른 장터기행을 떠나보자. 7일 열린 봉평장 공연은 인기가 좋아 1회성에 그치지 않고 비정기적으로 계속될 예정.
○ 활기 넘치는 시골장터
‘여름장이란 애시당초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 놓은 전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칩칩스럽게 날아드는 파리 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찮다.… “봉평장에서 한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이 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묘사된 봉평장터 풍경이다. 날짜 끝자리 수가 2일과 7일이 되면 장이 서는 이곳에서 예전 같은 분위기를 찾기란 한동안 어려웠다.
그러던 것이 들소리패 공연이 열리는 날은 시끌벅적한 장터분위기가 살아난다. 한복 차림의 할아버지부터 간신히 걸음마를 하는 어린 아기까지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활기가 넘친다. 여기에 닭, 오리, 꿩, 거위, 토끼, 칠면조 등도 한몫 거든다. 삐약거리는 병아리들 사이로 ‘꼬끼오’를 연발하는 닭, 그 옆에서 꽥꽥거리는 오리들의 합창이 장터를 메운다.
한 마리에 7000원 하는 꿩은 집으로 가져가서 키울 수도 있다. 지금 꿩새끼를 사면 내년 봄 어른꿩으로 자라나 화려한 색을 뽐낸단다. 한쪽에선 ‘뻥이요∼’ 하는 소리가 나면 주변에는 뻥튀기 한두 줌씩 거저 집어가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몰려든다.
장터바닥에 펼쳐진 물건들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싸리나무로 만든 소쿠리, 파리채, 검정고무신, 반질반질 윤이 나는 무쇠솥, 그 옛날 고무줄놀이에 쓰이던 검정고무줄…. 여기에 호롱불, 숯다리미, 풍경, 절굿공이, 화로, 인두 등 골동품 전시장 같다. 주인은 “잘 사가면 땡잡는 격”이라며 손님을 부른다.
장터의 최고 재미는 아무래도 먹을거리. 옥수수 가루로 만든 올챙이국수(2000원)가 가장 인기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양념간장을 넣어 먹는 국수는 고향의 맛 그대로다. 얼큰하게 술을 마신 노인들이 한 그릇씩 후르륵 마시며 속을 푸는 모습도 정겹다.
○ 장터와 문화공연의 만남
오후 1시경 출출해진 배를 채우고 나면 장터 한복판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들소리패 공연을 기다린다. 공연 전에 나눠받은 한지에 저마다 소원을 적어 공연장의 새끼줄에 매달아놓는다. 그리고 다함께 소원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는 것이 공연의 목적이기도 하다.
길놀이로 시작되는 공연시간은 보통 1시간30분 정도. 사람들과 함께 길놀이패를 쫓아 장터를 누비다 보면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길놀이 후 민요가락이 울려 퍼지면 다음은 공중줄타기. 가는 줄 위에서 떨어질 듯 말듯 아슬아슬한 묘기에 모두들 가슴을 쓸어내리며 박수를 보낸다. 크고 작은 북을 신나게 두들겨대는 북 공연은 한편의 문화공연이다. 사람들은 어느새 그 신명에 올라타 공연이 끝난 후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함께 줄다리기를 하거나 놀이판을 벌인다.
시골장터는 돌아올 때면 장터물건뿐만 아니라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향수를 덤으로 얻어오는, ‘수지맞는’ 여행이 아닌가 싶다.
이효석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되는 봉평 마을 입구. 효석문학관, 효석 생가터 등과 함께 물레방앗간, 충주집 등 소설의 무대를 둘러볼 수 있다.
○ ‘메밀 꽃 필 무렵’의 무대
장터의 분위기가 마무리될 때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를 찾아보자. 이효석 생가 쪽으로 5분쯤 걸어가면 가산 이효석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가산공원이 보인다.
그 옆으로는 흥정천이 흐르는데 소설 속에서 물에 빠진 허생원을 동이가 업고 건너며 혈육의 정을 느끼던 개울이다. 개울 건너편에는 성서방네 처녀와 허생원이 사랑을 나누던 물레방앗간도 있다. 물레방앗간 옆 나귀는 달빛 고운 보름달이 뜨면 금방이라도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낼 것만 같다.
동이와 허생원이 다투던 충주집, 허생원이 숨을 헐떡거리며 넘던 노루목고개도 옛 정취를 간직한 채다. 물레방앗간 옆에는 이효석문학관이 있고 이곳에서 15분쯤 걸어가면 이효석 생가가 나타난다.
물레방앗간과 이효석 생가 주변은 모두 메밀밭이어서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였음을 실감나게 한다.
글=최미선 여행플래너 tigerlion007@hanmail.net
사진=신석교 프리랜서 사진작가 rainstorm4953@hanmail.net
▼문화마을 들소리패 장터 기행
○ 5월 24일-충남 광천장
충남 홍성군 광천읍내 광천역 앞에서 날짜 끝수 4, 9일에 장이 선다. 광천은 새우젓으로 유명해 새우젓가게만 약 40여 곳에 이른다. 특히 6월에 생새우를 잡아 담그는 육젓은 살이 통통하고 껍질이 얇아 감칠맛이 난다. 인근에 있는 오서산 산행 후 둘러보기 좋다.
○ 6월 7일-경남 밀양장
밀양장이 열리는 삼랑진읍은 경부선·경전선 철도와 낙동강 뱃길이 맞닿은 곳으로 조선시대 말부터 5일장이 섰다. 최근 열차편 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낙동강에서 잡아 올린 잉어, 붕어와 산나물 등 시골 정서가 듬뿍 담긴 5일장을 구경할 수 있다.
○ 6월 26일-전남 영광장
굴비로 유명한 영광에서 감칠맛 나는 굴비 맛을 볼 수 있고 장터기행 후 조망이 뛰어난 백수해안도로에서 드라이브를 즐기는 맛도 그만이다.
○ 정선 5일장 관광열차 운행
날짜 끝수가 2, 7일이면 열리는 정선 5일장을 겨냥해 관광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11월까지 5일장이 열리는 날 오전 8시10분 청량리역을 출발해 당일 밤 9시55분 돌아온다. 요금은 어른 기준 왕복 2만7600원. 정선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아리랑 창극공연도 무료로 볼 수 있다. 들소리패 공연일정은 아직 미정.
먹을거리로는 황기백숙이 유명하고 주변에 볼거리도 많다. 정선선의 종점인 구절리역사는 이제 기차가 다니지 않아 호젓함을 맛볼 수 있고 화암동굴과 화암약수, 당대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는 몰운대 등 화암팔경도 볼 만하다.
(들소리패 일정 문의 02-744-6800,
www.dulsori.com)
▼1박2일 떠나볼까
1.봉평면 도착→봉평장터(2일·7일장)돌기→가산공원 산책
2.이효석문학관 탐방(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메밀국수 맛보기(1인분 4000원)→숙박
3.흥정계곡 둘러보기→허브나라 산책(어른 3000원, 어린이 1500원. 봉평면에서 6km)→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