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중국 단둥(丹東)에서 북쪽으로 120리쯤 떨어진 볜먼(邊門) 마을의 ‘이찬산(一面山)’역은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가오리먼(高麗門)’역으로 불렸다. “1962년인가, 류사오치(劉少奇·당시 중국 국가주석)가 평양에서 (조중비밀변계조약을 체결하고) 열차를 타고 돌아오던 길에 역명을 보고는 깜짝 놀라 바꾸라고 했다디요.” 볜먼의 조선족들 사이에는 1961년 중국 방문에 나선 김일성(金日成) 전 북한 주석이 이 곳을 지나다 역 이름을 보고 조선 땅이라고 할까 봐 중국 정부가 서둘러 개명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 무렵 이찬산역 인근의 ‘가오리먼차오(高麗門橋)’역은 아예 폐쇄됐다. 볜먼 남쪽의 ‘조선촌’도 ‘탕허(湯河)’로 이름이 바뀌었다.》
● 볜먼은 역사책에 나오는 책문
역사책에 나오는 책문(柵門)이 바로 볜먼이다. 책문이란 조선인들이 청(淸)나라에 들어갈 때 거쳐야 하는 국경검문소. ‘고려문’으로 불리기도 한 이 지역엔 일찍이 조선인마을이 형성됐다. 병자호란 때 포로가 됐던 조선인들이 터를 잡았다고 한다.
책문은 하나만 있었던 게 아니다. 청 이전에 명(明)은 랴오둥(遼東)지방 동북쪽 변경에 흙 돌 나무로 울타리를 쳤는데 이를 변장(邊墻)이라고 했다. 이어 청은 1660년대 허물어진 변장 근처에 버드나무를 잇대어 심고 그 바깥에 참호를 판 유조변(柳條邊)을 구축한 뒤 사이사이 사람과 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문을 20여개 만들었다. 그것이 책문이었다.
“명대에 변장의 동북쪽 지역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명과 형식상의 조공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실상 자치를 했다. 변장은 명의 국경선 역할을 한 것이다.”(남의현 강원대 강사)
● ‘압록-두만강이 국경’ 문건 거의없어
청은 왕조의 발상지인 변장의 동북쪽지역에 대한 관심이 명보다 컸다. 하지만 이 지역에 온전한 지배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린다.
중국학자들은 이 지역에 대한 청의 실질적 지배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유조변이 ‘만주를 보호·관리하기 위한 문화적 구분선’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러시아와 일본의 학자들은 대체로 유조변이 사실상의 국경선이었다고 해석한다. 이에 따르면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120리쯤 떨어진 책문이 청의 국경이 된다.
한국 학자들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청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조선과의 국경으로 표현한 문건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때까지 청의 공식문건에 나타난 가장 바깥쪽 변경은 볜먼 북쪽의 펑청(鳳城)이라는 것.
‘중국지’(1735년)에 소개된 프랑스 예수회 소속 선교사 레지의 지도(왼쪽). 지도상에 굵은 선으로 표현된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레지선’이 있다. 레지선과 압록강 사이에 평안도의 중국어 표기인 ‘PING NGAN’(네모안)이라는 지역명이 적혀 있어 이 지역 전역 혹은 일부에 조선의 지배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19세기 제작된 김대건 신부의 ‘조선지도(가운데)’와 일본인이 제작한 ‘동판조선국 전도(오른쪽)’에도 압록강 북쪽 지역 대부분이 조선 영토로 표시돼 있다.
● ‘레지선’과 ‘PING-NGAN’
청대 사서인 길림통지(吉林通志)는 “조선의 변경이 선양(瀋陽)∼지린에 접하였다”고 적었다. 통문관지(通文館志)는 펑황청(鳳凰城·지금의 펑청) 부근을 조선과의 경계로 기록했다. 청 강희제의 명을 받아 1708년부터 1716년까지 변경 지도를 작성한 프랑스 선교사 레지(R´egis) 또한 “펑황청 동쪽에 조선의 서쪽 국경이 있다”고 밝혔다.
레지의 실측도에는 조선의 북서쪽 국경선인 이른바 ‘레지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그려져 있다. 펑청 부근을 지나는 레지선과 압록강 사이엔 평안(平安)도의 중국어 발음을 표기한 ‘PING NGAN’이라는 알파벳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를 손질해 청이 내놓은 황여전람도(1718)엔 레지선과 이 문자가 없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는 “청이 불리한 내용을 지운 것 같다”고 추정했다.
일본인이 작성한 동판조선국전도(1882)나 김대건(1822∼1846) 신부의 ‘조선지도’에도 압록강 대안 지역 대부분은 조선 영토로 표시돼 있다.
● 고려 때도 집단이주가 있었다
중국 학계는 간도에 조선인들이 거주한 것은 봉금령이 내려진 1660년대 이후라고 주장한다. 청나라 영토에 불법적으로 넘어왔음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고려 때에도 이주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98년 중국 옌볜(延邊)에서 발간된 ‘중국조선족력사상식’도 “명 초기에 요동 일대에는 수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명 초기 요동지역 총인구의 10분의 3을 차지했다”고 인정한다.
특히 명말청초에 건너간 이주민의 자손들은 여전히 “나는 조선인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을 갖고 있다. 랴오닝성 번시(本溪)현의 박가보(朴家堡)촌과 허베이(河北)성 칭룽(靑龍)현 박장자(朴杖子)촌은 당시에 형성된 대표적인 조선족 마을. 이곳엔 아직도 동성동본 금혼과 같은 우리의 풍습이 남아있다.
● 조선인 마을 조선관리가 관할
1660년대부터 200여년간 이어진 청의 봉금 시기에 조선인들의 월강(越江) 이주는 두만강 대안지역 뿐만 아니라 압록강 대안지역으로도 대거 이뤄졌다. 그 결과 19세기 말 압록강 대안지역의 조선인 인구가 옌볜지역보다 많았다. 퉁화(通化) 환런(桓仁) 콴뎬(寬甸) 등에 이주한 조선인은 1897년 당시 3만7000여명에 이르렀다.
이에 조선 정부는 1903년 양변관리사를 파견해 서간도 지역 조선인 마을을 묶어 향약(鄕約)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조선의 행정력이 미친 것이다. 조선족 학계에서는 ‘동북 농업혁명’으로 일컬어지는 벼농사가 시작된 곳도 북간도가 아니라 서간도라는 것이 통설이다.
“1845년 뗏목을 몰던 평안도 초산 일대 80여 가구의 농민들이 훈(渾)강 유역에 논을 처음 만들었다. 1875년에는 평안도 사람들이 환런에 정착해 벼농사를 지었다. 130여년 전 훈강 유역에서 시작된 논농사가 간도 전역으로 신속히 퍼졌다.”(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2000년 옌볜)
● ‘東爲土門’에 가려진 서간도문제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 문제는 국내 학계에서 오랫동안 소홀히 취급돼 왔다. 백두산정계비의 ‘동위토문(東爲土門)’ 해석 문제에 집착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변장과 유조변에 맞닿아 있는 서간도 문제는 한국과 중국의 국경분쟁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정계비문 해석 문제에서 좀 더 시야를 넓혀 명과 청이 실제로 자국의 영토를 어디까지로 인식하고 있었느냐는 시각에서 간도문제를 바라보면 서간도는 동간도 혹은 북간도만큼이나 중요한 지역이다.”(박선영 교수)
볜먼·번시·평청=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