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질 슈만’이 왔다.
독일 중기 낭만주의 음악의 대가인 로베르트 슈만(1810∼1856). 그가 남긴 네 개의 교향곡은 선배격인 베토벤의 투쟁적이고 이상주의적 교향곡에 비해 지금까지 아담하고 간소하며 ‘체제 순응적’이라고까지 얘기돼 왔다. 베토벤의 작품이 프랑스 혁명의 여진(餘震)으로 끓어올랐던 시대를 반영한다면, 슈만의 작품은 잇단 시민혁명의 실패 속에서 일상사로 눈을 돌렸던 19세기 초반 ‘비더마이어 시대’의 정신사를 반영하기 때문일까.
최근 다니엘 바렌보임이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를 지휘해 내놓은 새 슈만 교향곡 전집(텔덱)은 이와 사뭇 다른, ‘남성적’이고 선 굵은 슈만상을 선보인다. 현의 질감은 굵고 끈질기며, 템포는 전체적으로 느릿하게 잡힌다. 약음(피아노)와 강음(포르테)의 대비는 한층 선명한 콘트라스트로 표현된다.
4번 교향곡의 3악장에서 4악장으로 넘어가는 부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연주하는 현악부에 이어 금관이 한껏 느린 템포로 긴장감을 주며 용틀임 하듯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팀파니가 ‘쿠르릉…’ 소리를 내며 전체 합주를 뒤덮어버린다. 이전의 연주들에서는 작은 구릉처럼 느껴졌던 부분들이 장대한 산악처럼 다가온다. 금관부의 볼륨이 거대한 데 비해 다소 뻣뻣한 느낌으로 유연성을 잃은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사소한 데 연연하지 않는 호연지기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면 나쁘지 않다.
바렌보임은 2000년에도 이번처럼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연주로 텔덱사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발매하면서 슈만 전집과 같은 ‘근육질’ 느낌의 주관적 해석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베토벤의 ‘혁명성’이야 익히 알려진 바여서, 당시 그의 남성적, 도취적 연주는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슈만에까지 영역을 넓힌 그의 ‘근육질’ 해석이 이번에는 ‘과다연출’로 받아들여질까, 아니면 ‘적절한 개성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질까. 기자라면 후자를 택하고 싶다. ★★★☆(별 5개 만점)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