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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다시 보자]고구려사 쟁점들…(8)발해의 건국주체

입력 | 2004-05-24 18:03:00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근교 코르사코브카 절터에서 발견된 봉황무늬 연화문 와당. 연화문은 고구려양식의 계승이고 여기에 봉황무늬가 더해진 것은 신라의 영향으로 보인다.-사진제공 한규철 교수


발해(698∼926) 건국에는 고구려 유민의 부흥 의지가 큰 역할을 했다. 고구려가 668년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뒤 많은 고구려 유민들은 당으로 강제 이주 당하지 않으면 안 됐다. 주로 지방호족 세력이 이동의 중심에 있었는데, 고구려 출신으로서 당의 장수로 활약한 고선지(高仙芝)나 이정기(李正己) 장군, 그리고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大祚榮) 가문이 이때 이주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랴오둥(遼東)지역에서 고구려 세력은 그 힘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안시성 등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이 있었는가 하면, 당에 압송됐던 보장왕이 677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 조선왕에 봉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 또한 고구려 부흥을 꾀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구려 유민들의 힘은 결국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도록 만들었다. 696년 5월 때마침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 등은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이주지인 영주(營州·랴오닝성 차오양·朝陽)를 빠져나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해 발해를 건국했다.

● 대조영은 고구려의 쑹화강 출신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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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고려시대 ‘제왕운기(帝王韻紀)’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고구려 쑹화(松花)강 유역 출신의 장수였다. ‘구당서(舊唐書·945년)’는 대조영이 고구려계임을 말하고, 이를 보완한 ‘신당서(新唐書·1060년)’는 그가 쑹화강 출신임을 전한다. 그러면 대조영은 고구려의 후예였는가, 아니면 말갈족이었는가.

이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구당서’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이라 하고, ‘신당서’는 그가 말갈의 대표적 부족 중 하나인 속말(粟末)말갈인으로서 ‘고구려에 부속됐던 자’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대조영을 구당서를 원용해 고구려계로 보려는 한국학계와, 신당서를 중심으로 속말말갈계로 보려는 중국학계의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우리 학계는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요,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설을 지지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피지배층인 말갈도 다 같은 고구려인이라는 점에서 대조영의 말갈설이 지지되기도 한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근거는 종족적인 면에서 대조영을 비롯해 말갈로 불리는 대부분의 주민이 패망한 고구려인이었다는 점이 가장 크다. 다음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풍속이 고구려와 같다는 구당서의 기록이다. 문화적인 면에서 발해인은 고구려인이 사용하던 온돌을 썼고, 고구려 지배층의 석실 및 석관·석곽묘도 이용했다. 문화적으로 가장 변하지 않는 주거방식과 무덤양식에서 고구려를 계승했던 것이다.

● 자주국이었던 발해

중국이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이었다고 내세우는 근거는 발해가 당나라의 책봉을 받았고 조공을 ‘바쳤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발해는 당 문화 일색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해는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시에 있는 정효공주 묘의 묘지명을 통해 볼 때, 왕을 황상(皇上)이라 하여 황제를 자칭했다. 그리고 연호(年號)와 왕이 죽고 난 이후에 사용하는 시호(諡號)도 ‘사사로이’했다고 신당서는 전한다. 일부 국내외 학자들은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비로소 발해라고 하였다’는 신당서 기록을 근거로, 발해가 마치 당으로부터 국호를 하사받은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이 발해를 비칭(卑稱) 종족어인 ‘말갈’로 사사로이 부르다가, 양국간 관계가 개선되는 시점에서 공식 국호인 ‘발해’를 사용한 사실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당은 양국관계가 우호적이지 않던 발해 건국 초기엔 일방적으로 발해를 ‘발해국’이 아닌 ‘발해군’으로 깎아내려 규정했는가 하면, 발해국을 말갈국이라 국호마저 고쳐 불렀다.

또한 당의 주변국 역사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일반적 논리인 책봉과 조공에 관한 주장도 마찬가지다. 고대 동아시아사에서 책봉은 왕조 승인의 의미를 가지며, 조공 역시 관영(官營) 무역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는 인정하더라도, ‘지방정권’으로 여길 만한 근거는 빈약하다.

● 발해사를 둘러싼 주변 각국의 연구동향

발해는 그 영토가 지금의 중국 지린성, 헤이룽장(黑龍江)성, 랴오닝(遼寧)성 등 이른바 중국의 동북3성 지역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지역에 걸쳐 있던 왕조였다. 각국의 발해사에 대한 견해가 각기 자국 중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욱이 발해인들이 남긴 기록이 전무한 실정이기에 이를 둘러싼 역사분쟁은 더욱 치열하다.

중국이 동북3성 지역의 개발과 함께 역사적 명분을 확실히 해 두려는 노력을 기록상으로 허술한 발해사에서 시작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교과서는 이미 1980년대부터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인 말갈국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편 러시아는 발해를 자주국가로 보면서도 그 종족은 중세 말갈왕조라고 하는가 하면, 일본은 만주국 시기까지 ‘발해 말갈설’을 유지하다가 1933년 시라토리 구라키지(白鳥庫吉)의 논문부터 ‘지배층=고구려 유민, 피지배층=말갈 설’을 따르고 있다.

남북한은 종래 일본의 연구 성과를 인정해 교과서에도 지배층만이 고구려인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남쪽의 필자와 북한학계를 중심으로 말갈로 불리는 피지배층도 대부분 고구려인이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상식적으로 고구려인이 살던 곳이 대부분 발해가 되었는데 이들을 고구려와 다른 말갈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주된 논지다.

한규철 경성대 사학과 교수


▼말갈은 동북방 거주민 통칭▼

말갈의 실상은 중국 중심의 역사관과 왕조 중심의 역사관을 극복할 때에야 바로 볼 수 있다.

말갈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북제서(北齊書·563년)부터 등장한다. 이때부터 말갈은 자칭 아닌 타칭의 종족명이었다. 말갈과 그 조상이라고 하는 숙신(肅愼), 읍루(읍婁), 물길(勿吉) 등도 자칭이 아니라 중국 왕조에서 일방적으로 부른 이름이었다. 즉 당의 동북방 이민족을 통칭하는 종족명이자 고구려의 지방민을 낮추어 부르는 이름이었다.

말갈도 지역에 따라 일곱 갈래가 있는데, 백산말갈이란 백두산지역 주민이란 뜻이고, 속말말갈이란 쑹화강 지역 주민이란 뜻이다. 이들이 곧 발해 건국의 주체 세력이었다. 헤이룽(黑龍)강 지역의 흑수말갈은 고구려 주민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들이야말로 진짜 말갈족이라고 할 수 있다.

말갈로 불리는 주민들이 살던 곳은 과거 옥저, 예, 맥, 부여인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고구려의 영역이 된 곳이다.

고구려를 다민족국가로 언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건국 초기였으며 후대에는 이들이 모두 고구려인으로 동화됐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고구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발해인도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말갈로 불리는 많은 이들은 고구려인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 발굴된 중국 지린성 허룽시 발해 문황의 넷째딸 정효공주 묘의 벽화(왼쪽). 정효공주 묘는 고구려 지배층의 무덤양식인 석실봉토분으로 그 묘비명에서 문왕을 ‘황상’이라 칭하고 ‘덕흥’이라는 연호를 쓰는 등 고구려를 계승한 독자성을 보였다. 오른쪽은 러시아 연해주 남단 크라스키노의 발해 성터. 이 곳에서 고구려 양식이 뚜렷한 성벽이 발굴됐다.-사진제공 한규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