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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三. 覇王의 길

입력 | 2004-05-24 18:23:00


鴻門의 잔치(18)

항우가 잠시 입을 다물고 패공과 번쾌를 번갈아 바라보자 술자리는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항우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앉으라. 이 자리는 내가 벌인 술자리다. 치국(治國)이나 병진(兵陣)의 일을 꺼내 취흥을 깨지 말라.”

항우가 번쾌의 말에는 대꾸 않고 호쾌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다시 오만과도 같은 항우의 자부심과 고집에 가까운 자신감이 모처럼의 냉정한 성찰을 무시해버린 탓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이들을 그렇게 보았고, 더군다나 이미 한번 용서한 자들이다. 내 헤아림과 느낌을 여럿이 보는 앞에서 손바닥 뒤집듯 할 수는 없다….)

번쾌가 더 뻗대지 않고 장량 곁에 앉자 항우는 다시 여럿에게 술을 돌리게 했다. 그리고 겉으로는 전과 다름없이 호쾌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주의 깊게 살피고 헤아리기 시작했다.

항우의 그 같은 변화를 눈치 챈 패공은 다시 속이 탔다. 언제 다시 항우가 변덕을 부려 목에 칼을 들이댈지 모른다 싶으니, 마시는 술과 씹는 고기가 제 맛이 아니었다. 한참이나 머리를 짜내 속이 좋지 않은 시늉을 하다가, 여럿에게 들릴 만큼 큰소리로 측간(厠間)을 묻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막을 나서기 전에 패공은 눈짓으로 장량과 번쾌를 불렀다. 장량과 번쾌가 눈치를 보아 가며 어렵게 술자리를 빠져 나오자 패공이 낭패한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는 오래 있을 자리가 못되는 것 같소. 하지만 항왕(項王)에게 하직인사도 않고 나왔으니, 그냥 가면 뒤탈이 있을까 걱정이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큰일을 하려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 법입니다. 바야흐로 저들은 칼과 도마가 되고, 우리는 도마위에 놓여 칼날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물고기 신세가 난 꼴인데, 인사는 무슨 인사입니까?”

번쾌가 그러면서 어서 몸을 빼 달아나기를 재촉했다. 머뭇거리던 장량도 그 길밖에 없다는 듯 마침내는 머리를 끄덕여 번쾌의 뜻을 따랐다.

“그럼 이대로 떠나겠소. 하지만 우리가 모두 아무 말 없이 떠나버리면 항왕은 틀림없이 크게 성을 내고 대군을 들어 뒤쫓을 것이오. 자방(子房) 선생께서 남아 항왕에게 사죄를 드리고 뒤탈을 없이 해보는 게 어떻겠소?”

패공이 장량을 사지(死地)에 남기면서도 뻔뻔스러울 만큼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장량은 조금도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패공이 그만큼 자신을 믿고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이라 여긴 것인지 전에 없던 의욕을 보이며 물었다.

“패공께서는 오실 때 무슨 예물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백벽(白璧=흰 옥으로 만든 고리 모양의 구슬) 한 쌍은 항왕께 바치고, 옥두(玉斗=옥으로 만든 술잔) 한 쌍은 아부(亞父)에게 주고자 마련해 왔소. 하지만 그들 두 사람의 사납고 성난 모습을 보자 감히 바칠 엄두가 나지 않았소이다. 그러니 공께서 나를 대신해 둘에게 바치고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시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