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셀렉션’ 대표 김형근씨. 문화관련 업체의 수출담당, 고교 영어교사, 통신사 기자를 거쳐 한국문화의 해외진출에 다리를 놓는 메신저 역할을 하게 됐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을 취재할 때마다 레이더망에 걸리는 지점이 있었다. 한 외국인은 영어로 번역된 소설 ‘하나코는 없다’를 쓴 최윤을 만나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고도 했고, 또 누군가는 영화 ‘올드 보이’가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탔다는 소식을 듣고 DVD 영문자막 상영회와 약식 토론회에 참석했다고도 했다. ‘어디서?’라고 물을 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서울 셀렉션”이었다. 그곳이 뭐하는 곳이기에?
서울 종로구 사간동 경복궁 맞은편에 있는 ‘서울셀렉션’ 카페를 찾아갔다. 외국인들에게 영문으로 된 한국 책과 영화 DVD를 팔고 매주 토요일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영화 상영회가 열리는 곳이다. 서울의 문화, 공연 소식을 알리는 같은 제목의
e메일 영문 뉴스레터도 이곳이 발신지다.
입구 메모판에는 ‘Buy something, Keep Hank in Business(뭐라도 사라. 행크가 이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라는 메모가 휘갈겨 쓰여 있다. 그 아래엔 ‘I did(샀다)’라고 적힌 작은 메모가 또 붙어 있다.
“내가 망할까봐 외국인들이 더 걱정해 주는 것 같다니까요.”
외국인들 사이에선 ‘행크’라고 불리는 ‘서울 셀렉션’ 대표 김형근씨(42)가 멋쩍게 웃는다.
‘이런 종류의 일은 공공단체의 몫이 아니냐’고 묻자 그는 “나는 ‘공익요원’이 아니라 섹시하고 매력적인 한국 문화상품의 시장을 넓히려는 비즈니스맨”이라고 대답한다.》
○우리 영화 영문자막 상영 성사
2년 전 그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15년간 통신사 기자로 일하면서 발견한 ‘필요’ 때문이다.
그는 “영화인들이 스크린 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 사수 시위를 하는 것을 보고, 문화는 힘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감했다”면서 “힘을 키울 수 있는 무대를 넓히려면 해외진출이 필수적인데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물 속의 고기를 먼저 잡자고 생각했다”고 한다.
“국내 거주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를 판매하는 일부터 시작해 보자, ‘한국문화’라 하면 한복 고궁을 먼저 떠올리는데, 낡은 틀에서 벗어나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자”는 것이 그가 발견한 ‘필요’였다.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셀렉션’ 문을 연 뒤 통신사에서 일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외국 대사관 직원 50명에게 주간 뉴스레터를 발송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받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사람에게만 보내는 뉴스레터가 지금은 매주 3800명에게 발송된다. 지난해 8월부터는 서울시와 공동으로 영문 문화잡지 ‘서울’을 매달 7000부씩 발행하고 있다.
카페에서 지금까지 상영한 한국영화만 110편. 소설가 최인호, 화가 김선두, 영화 ‘송환’의 김동원 감독 등을 초빙해 외국인들이 이들의 작품을 함께 보고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도 6주에 한 번꼴로 연다.
넓은 오지랖은 적당히 그칠 줄을 몰라서 그는 종로의 영화관 시네코아에 한국영화 영문자막 상영을 제안해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효자동 이발사’ 등 개봉작들을 영문으로 상영하는 것도 성사시켰다. 올해 1∼3월 1500여명의 외국인이 그곳에서 한국인들 틈에 섞여 한국영화를 즐겼다.
○‘한국문화 세계화’ 아직 걸음마 수준
그는 “한류열풍이니 해외영화제 수상이니 해서 한국문화의 세계화가 상당히 진척됐다고들 하지만 외국인들은 서울에 세종문화회관 같은 대규모 공연장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서울셀렉션’ 홈페이지(www.seoulselection.com)의 DVD 쇼핑몰에서 가장 반응이 좋은 한국영화는 의외로 국내 개봉 때 참패한 ‘지구를 지켜라’다. 한국의 고전미를 화면에 담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나 ‘취화선’은 판매가 부진한 편.
그는 “외국인들이 한국의 문화상품을 살 때는 ‘한국적’이어서가 아니라 독특한 ‘문화’상품이라서 사는 것”이라며 “한국적인 것을 세계화한다는 것은 미망에 불과하며 보편적인 콘텐츠로 승부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책도 한국의 아름다움을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종류의 책은 판매가 부진한 대신 AP서울통신원이 쓴 ‘How Koreans Talk’처럼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한국을 바라본 책들의 반응이 좋다. 그는 “궁극적으로는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고 동남아에 문화상품 전진기지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한국문화의 세계화는 지금도 초기 단계다. 남들은 우릴 잘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낯선 이들의 줄잇는 감사 편지
그의 가게에 들른 외국인 중에는 ‘티베트 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여행자가 다음 목적지가 서울이라니까 서울의 문화를 제대로 알려면 ‘서울셀렉션’에 가라고 소개해줘서 왔다’는 사람도 있다.
지난해 해외여행 안내책자인 ‘론리 플래닛’에 실린 가게 소개를 보고 찾아오는 배낭여행객들도 꽤 된다. 한 달간 108개국에서 900명이 넘는 방문객이 그의 홈페이지에 들렀다.
그의 e메일함을 열어 봤다. 그가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들의 감사 편지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로스앤젤레스에도 ‘서울 셀렉션’ 같은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곳 사람들은 이 도시에 낯선 모든 이들이 모험과 사고를 통해 스스로 도시를 발견하라고 내버려두는 듯합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M.A.)
“미국에 돌아왔지만 뉴스레터를 끊을 생각일랑 하지 마세요. 서울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계속 알고 싶으니까요.”(미국 워싱턴 DC에서 헤럴드)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