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의 밤’, 2003년
흰 저고리 검은 치마에 무명수건을 둘러쓰고 고무신을 팔고 있는 여인, 달구지에 살림살이를 싣고 북풍한설 몰아치는 산길을 남부여대(男負女戴) 피란 가는 가족….
‘고바우 영감’을 그렸던 시사만화가 김성환 화백(73)이 6월 7∼12일 서울갤러리에서 여는 개인전 ‘판자촌 시대’에는 1950∼60년대 판자촌 풍경과 1·4후퇴 피란민 행렬을 그린 작품 36점이 선 보인다. 젊은 세대는 존재조차 모르고 기성세대에게서는 점점 잊혀져 가는 옛 풍경들이다.
오일 페인팅으로 그린 전시작들에서는 만화가다운 풍자적 필치가 엿보인다. 그러나 간판 글씨, 판잣집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 하나까지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한 풍속화다. 1·4 후퇴 당시 기관차에 올라타고 매달려가거나 달구지를 끌고 떠나는 피란 행렬을 그린 ‘후퇴’에는 87명이 등장하는 데 똑같은 얼굴이 하나도 없다.
이런 정밀한 재현이 가능했던 것은 일제강점기에 운행된 기관차 하나를 그리기 위해 교통박물관에 며칠씩 머물며 스케치를 하는 등 작가가 기울인 열정에 기인하지만, 무엇보다 김 화백이 ‘그때 그 시절’ 현장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김 화백은 6·25 전쟁 당시 종군화가로 동원되어 중부전선에서 최전방까지 갔고 1·4후퇴 때 군 트럭을 타고 피란길에 올라 한동안 대구 동천시장 판자촌에 살기도 했다. 그는 “최근 청계천 복원소식을 듣고 서울 청계천변 판자촌이 영화장면처럼 떠올랐다”며 “석양에 비친 판잣집은 때때로 금빛으로 빛나고 아름답기조차 했다. 먹고 살기는 힘들었지만 내일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어 사람들은 정이 넘치고 아름다웠다”고 회고한다. 얼핏 신파나 고리타분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노 화백이 재현한 그 때 그 시절 풍경에는 해학과 따뜻함, 모던함마저 넘친다. 이 혼돈의 시대에 과연 지금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성찰해 볼 수 있는 전시다.02-2000-9736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