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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5월 여섯째주

입력 | 2004-05-30 18:47:00

1950년대 수산장에서 일하게 된 ‘전쟁 미망인’들이 유엔 지원으로 도입된 직물기를 살펴보고 있다.-‘다큐멘터리 한국전쟁’ 자료사진


▼全國 六個所에 授産場 戰爭 未亡人들의 生活安定 爲해▼

전쟁 미망인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회부에서는 ‘운크라’ 一九五三년도 계획에 의한 미망인 수산장(授産場) 설치 작업을 추진 중에 있던 바 이번에 미국으로부터 ‘재봉기’ ‘편물기’ 등 시설 일부가 도착하여 전국 六개소에 수산장을 설치하기로 최종적인 결정을 보게 되었다 한다.

사회부 당국자의 말에 의하면 수산장은 二십평 내지 三십평 정도의 건물을 구비하고 우선 一개소에 ‘재봉기’ 십대씩과 ‘편물기’ 三대씩을 비치하여 전쟁미망인들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는 동시에 앞으로 계속해서 시설확장을 기하게 될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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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미망인 돕자”…‘수산장’ 설치▼

6·25전쟁 동안 전체 사상자수는 100만명이 넘었다. 사상자 중에는 특히 청장년 남성이 많았고 이로 인한 ‘전쟁 미망인’도 50여만명(1957년 보건사회부 통계)에 이르렀다.

이들이 부양해야 할 가족은 91만여명이나 됐지만 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정부의 직접적인 구호 없이는 생활이 힘든 극빈층이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1953년 ‘모자원’을 설치해 이들 중 일부를 수용했다.

이와 별도로 정부가 1953년 유엔한국재건단(UNKRA) 계획에 의해 도입된 재봉기와 편물기 등을 비치해 미망인들로 하여금 자립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공간이 바로 수산장이었다.

해방 직후 외국의 대한(對韓) 원조는 주로 미국 경제원조처(ECA)의 지원이 주축을 이루다가 6·25전쟁 발발로 1951년 종료됐다. 종전 이후엔 한국민간구호계획(CRIK)과 유엔한국재건단계획 등을 통해 이뤄졌으나 식료품 의류 등 소비재에 치우치는 바람에 국내 생산기반 확보로 이어지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의 대외 의존을 심화시켰다는 지적도 받는다.

1957년에 이르러 모자원은 전국적으로 63개소가 생겨났고 수산장도 87개소로 늘었다. 그러나 이곳에 수용된 ‘전쟁 미망인’이나 부양가족은 전체의 2% 남짓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해당자들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산장은 하나 둘씩 사라져갔고 모자원도 미혼모나 극빈층 여성 등을 위한 재활 터전으로 바뀌었다.

‘남편과 함께 죽었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 않은 아내’라는 뜻의 ‘미망인(未亡人)’이란 표현은 이제 성차별적인 용어라고 해서 잘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이든 병이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여성들의 삶은 지금도 여전히 고달픈 게 현실이다.

조용우기자 woo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