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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만혁씨 개인전 ‘주문진 바다서 길어올린 고독’

입력 | 2004-06-01 18:32:00


그물을 깁고 있는 여인 옆의 또 다른 여인이 그물에서 빠져나온 줄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긴 머리의 다른 여인은 멀찍이 앉아 그 줄을 가위로 자르려 한다. 멀리 보이는 작은 등대는 세 여인이 앉은 자리가 바닷가임을 암시한다.

임만혁씨(37)가 그린 ‘세 여자 이야기’에는 삼각구도로 앉아있는 서로 다른 포즈의 세 여인이 등장한다. 갈색 바탕 화면에 노랑, 빨강 원색의 여인들 옷 색깔이 대비된다. 커다란 얼굴, 앙상한 팔다리, 어느 곳을 응시하는 지 분명치 않은 시선들, 날카롭게 예각으로 처리된 선들에선 여인들의 소외와 고독이 묻어난다.

하지만, 목탄 드로잉이라는 작가만의 독특한 선묘는 자칫 거칠어 보일 수 있는 화면을 부드럽게 바꿔 놓는다. 한지에서 배어나온 은은한 색조 역시 수묵 담채화를 연상시키며 예각의 화면을 완화시켜 준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하고, 예리하면서도 부드럽고, 공허하면서도 꽉 채워져 있는 듯한 느낌, 이것이 임만혁 그림의 매력이다.

작가는 2000년 동아미술제에서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2002년 시카고 아트페어에서는 그의 출품작 11점이 모두 매진됐으며 2003년 3월에는 성곡미술관이 발굴한 신진작가로 선정돼 첫 개인전을 가졌다. 상업화랑에서 갖는 첫 개인전이 15일까지 서울 청담동 박여숙화랑에서 열린다.

작가는 한지와 염료라는 동양화 재료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목탄 드로잉이라는 서양화적 기법으로 현대인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는 그를 두고 “일상의 풍경을 내면의 풍경으로 치환시키는 독특한 발상의 작가”라고 말한다.

그의 그림은 문학적이다. 언뜻 보면 작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 지금까지 살고 있는 강원도 주문진 앞 바다와 사람들에 대한 덤덤한 묘사처럼 보이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면 안에 흥미 있는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예를 들어 ‘세 여자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 속 인생을 주관하는 세 여신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그물을 깁는 여인은 탄생을, 실을 풀어내는 여인은 삶을, 끊으려는 여인은 죽음을 상징한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는 세월의 파도를 몸으로 이겨 낸 중년 사내의 무심한 낚시질, 새벽바다로 출항하는 남편을 위해 그물을 깁는 아내의 생활 등 일상적 소재들이 등장하지만 그 안에는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 삶의 욕망, 미련, 기쁨, 증오, 분노, 회한 등이 숨어 있다.

‘관찰이 취미’라는 작가는 “책을 읽거나 주변 사람, 풍경을 오래 바라보며 떠오르는 감상들을 화폭에 옮긴다”고 말했다. 02-549-7574∼6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