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피곤하고 옹색한 처지’ ‘지정학적으로 조건 지워진 변방의 역사’….
더 중요한(?) 다른 발언들 때문에 언론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지난주 연세대 특강에서 마지막 부분은 한국의 안보현실에 대한 고민으로 채워져 있다.
“어쩔 수 없이 강대국의 눈치를 보고 거기에 맞춰야 하는 운명을 바꾸려면 동북아 평화번영 시대를 앞당겨야 한다.”
“북한 핵개발은 일본과 중국의 군비 강화로 이어질 것이고, 거기에 말려들면 우리도 죽기 살기로 동참할 수밖에 없게 되므로 반대한다.”
맞는 말이다.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힘의 불균형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다는 말도 맞고, ‘변방의 역사’를 끝내려면 나라 지킬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도 맞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 “말로만 자주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백 번 맞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무엇인가.
주한미군 감축협상이 곧 시작된다. 미국 말로는 “병력은 줄어도 전력(戰力) 감소는 없다”고 한다. 정부도 “걱정 말라”고 한다. “무조건 미국 바짓가랑이를 잡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라는 말도 나왔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아직 없다. 협상전략이라서 그런가?
주한미군 문제를 단계별 용어로 접근해보자. 첫째는 규모(scale) 및 구조(structure)의 변화다. 주한미군 규모의 변화는 지상군과 해-공군의 비율, 즉 구조 변화를 동반한다. 이 같은 변화가 남북간 긴장완화와 병행해서 이뤄지면 좋겠지만 이번은 그게 아니다. 일방적으로 미국의 필요에 의해서다. 1954년과 1971년 한국은 주한미군의 부분 철수에 따른 군사적 경제적 대가를 확실하게 챙겼다. 이번엔 어떤 안보 보장책을 챙길 수 있을지 궁금하다.
다음 단계는 주한미군이 한국 방어를 전담하는 ‘붙박이’에서 동북아지역까지 맡게 되는 역할(role) 변경이다. 미군의 작전범위가 넓어지면 한국군과 미군이 맡는 임무(mission)에 변화가 생긴다. 한마디로 한국 방어를 한국군이 주도하고, 미군은 보조역할에 그치게 된다. ‘자주국방’이 발등의 불이 됐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자칫하면 마지막 단계인 주한미군의 지위 혹은 성격(status) 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유엔 결의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법적 근거를 가진 주한미군의 성격이 바뀌는 것은 한미 동맹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뜻한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더 ‘옹색한 처지’가 될 수 있다.
한미관계에 심리적 균열이 커진 시점에 주한미군 감축 협상이 시작된다는 게 찜찜하다. 두 나라 사이가 벌어질수록 미국이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커질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주한미군의 지위 변경과 북한의 핵 포기를 맞바꾸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면 주한미군은 한국 편이 아니라 남북한 사이의 중재자가 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한미군 계속 주둔’을 인정했다는 것도 이런 전제에서 한 말이 아닐까?
노 대통령의 장기적 안보 해법은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구축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막연한 구상보다 한미동맹의 미래 청사진을 마련하는 게 더 급하다.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