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한 곳이 빈 듯한 허전한 가슴으로 기다려 온 세월이 어언 70여년. 일제 강점하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31년 해외 망명 이후 족적을 찾을 길이 없던 나의 백부 윤자영(尹滋瑛) 선생을 기다려 온 것이다.
최근 외교통상부의 통지를 받았다. “주러시아 한국대사관은 ‘KGB문서보관소 내 스탈린 숙청시 사망한 고려인 명단’을 확인한 바 윤자영은 1938년 10월 2일 노보시비르스크주 내무인민위원회에 의해 총살형이 선고돼 10월 14일 집행됐으며 1958년 12월 19일 복권됐다.”
70년 기다림의 결과는 이것이었다. 스탈린 대숙청기에 많은 한인 망명객이 ‘일제의 밀정’ 또는 ‘종파분자’의 누명을 쓰고 숨진 줄 알고 있었으나 선생 역시 그 운명의 제물이 된 것을 확인하니 허탄한 심정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선생은 경성전수학교(서울대 법대의 전신)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 때 서울지역 학생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해 1년반 복역했고 출옥 후엔 서울청년회의 창립과 조선청년회연합의 기관지 발행 등에 혁혁한 공을 남겼다.
그 뒤 중국 만주 시베리아를 전전하며 사회주의적 광복의 길을 모색하다 스탈린 독재의 칼날에 쓰러진 것이다. 70년 가까이 시베리아 하늘 아래 싸늘한 시신으로 눈을 감지 못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원통하다.
이렇게 서거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뒤 정부기록보존소에 선생의 3·1운동 관련 재판기록을 찾으러 갔더니 직원이 “왜 이제야 왔느냐”고 힐문했다. 3·1운동 관련자 가운데 후손이 기록을 찾아 복사해 가지 않은 사람은 선생뿐이라는 것이다.
국내에 직계 후손을 남기지 않았으니 누가 그 치열했던 독립투쟁의 정신과 행적을 정리해 후세에 남길꼬. 6월 호국보훈의 달에 선생의 애끓는 조국사랑이 뒤늦게나마 겨레의 가슴에 한 송이 들국화로 남기를 빌어 마지 않는다.
윤동규 전직 교수·서울 영등포구 당산동